암 희망 수기
[암 희망 수기 8회] 내 인생의 또다른 출발
2023-03-06 19:49
글쓴이 : 김*주
유난히 힘든 2022년,
젖 먹던 힘까지 다해서 버텼건만 결국 내 앞에 닥치는 불운을 피해 갈 수는 없었다.
작년에 남편이 심장 스텐트를 3개 심고 중환자실로 들어가고 며칠째 텅 빈 집을 들어설 때는 참으로 무서움을 느꼈다. 어쩌면 내가 혼자 살아야 할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몸이 오싹했다. 호랑이에게 물려가도 정신만 차리면 산다고. 이럴 때일수록 정신을 차려야지. 내가 누군가. 오뚜기 인생이 아닌가.
겨우 1년째 남편의 건강을 챙기는데 올해 4月 1日 너무 숨이 차서 CT를 찍어보니 폐의 2/3가 물이 찬 게 아닌가. 스트레스가 만병의 근원이라더니. 학동 전대병원 응급실로 옮겨서 2일째 2,000cc 이상의 물을 빼내고 폐에는 이상이 없는데 그 물에서 난소암세포가 발견되었다고 한다. 초정밀 MRI를 1시간 동안 찍고 화순 전대병원에 예약해주신다고 한다. 그 사이에 코로나에 걸려서 격리하면서 남편과 집 안 대청소를 했다. 만약의 경우 내가 다시 이 집에 못 올 수도 있을 때, 남편 혼자서 1년은 버틸 수 있게 정리, 준비해두었다.
4月 25日 아침 해가 붉게 뜨는데, 과연 내가 살아서 다시 저 해돋이를 볼 수 있을까 만감이 교차했다. 남편을 보니 머리가 많이 빠져 정수리가 다 보이고 듬성듬성 흰머리로 덮여있다. 당신도 참 한평생 사느라고 고생이 많네요. 그래, 다시 희망을 갖자.
4月 27日 수술 날짜 이틀간 딱히 할 게 없어서 간호사 선생님에게 A4 용지 두 장을 얻었다. 가진 것을 볼펜뿐. ‘감사’라고 그림을 그렸다. 보기 좋다며 간호가 게시판에 붙여놨단다.
4月 26日 종이 한 장을 펴놓고 생각에 잠겼다. 마지막이 될지도 모르는 이 종이에 뭐라고 쓸까. 바쁘게 다니는 간호사들을 보니, 그렇지, 내 마지막을 보는 사람은 저 간호사들이지. 백의의 천사. 그래, 천사. 온 정성을 다해 천사를 이쁘게 꾸며서 건네주었더니 모두 좋아한다.
그래요. 고마워요. 여러분이 있어 난 외롭지 않지요.
4月 27日 6시간의 수술 끝에 여섯 군데를 제거했다. 김석모 교수님께서 수술은 잘 되었다고 하신다. 감사합니다. 너무 아파서 참으려 해도 소리소리 질렀다. 배를 세로로 쨀 수 있는 한 다 쨌다고 한다. 참혹하다. 그래도 난 살았다. 훌륭한 능력을 갖춘 의료진을 만나 감사하기 그지없다. 감사하고 또 감사합니다. 밤새 소리를 너무 크게 질러댔다.
다음날. 통증이 조금 가라앉자 정신을 차리고 주위 분들께 죄송하다고 사과를 드렸다. 주위 분들이 이해를 해주셨다. 얼마나 아프면 저럴까. 그에 비하면 우린 경증이니 다행이라고 하셨다.
건강을 잘 챙겼기에 회복이 빨랐다. 병원에서 나오는 식사는 하루도 빠짐없이 다 먹었다. 5일 만에 퇴원할 때는 잘 걸어 다녔다. 나윤영 의사 선생님이 오셔서 실밥을 뜯는데 내가 하는 말, 제가 2010년에 전대병원에 시신 기증을 했는데 나중에 학생들이 공부하려고 내 몸을 열어봤다가 이것, 저것, 그것들이 없으면 얼마나 실망할까 그게 걱정입니다. 했더니 나윤영 의사 선생님 크게 웃으면서 그렇게 긍정적이어서 회복이 빠르다고 칭찬을 하신다. 어차피 100세 인생에 100세까지 못 살면 명이 짧은 겁니다. 하하.
5일 만의 퇴원에 병원 가까이에 있는 푸른솔 요양병원으로 옮겼다. 그때까지 난 나이가 드신 노인들만 거기에 입원해있는 줄 알았다. 다양한 연령대의 남녀노소분들이 입원해계셨다. 난소암 4기라서 난소, 자궁 양막, 맹장, 대장도 20㎝ 잘라내서 대변을 자주 봐야 했다. 밤새 잠 못 자고 30분에 한 번씩 화장실에 들락거렸다. 80% 소화된 변이 나온다. 손가락 크기 만큼씩. 오죽하면 같은 방 환자가 하는 말이 “걍 언니 침대를 화장실로 옮겨야겠네.” 했다.
시간이 지날수록 점점 호전되어 화장실 가는 시간이 늦춰지고 식사는 식당에서 주는 식사는 한 가지도 빼지 않고 골고루 다 딱 1인분씩만 먹었다. 욕심부리다가는 토하고 배탈에 설사가 나는 걸 옆 사람들을 보며 배웠다. 아침이면 국민체조를 하기에 처음에는 못 움직이니 구경만 하다가 손도, 팔도, 목도 움직이면서 서서히 따라서 체조도 했다.
아랫배를 제거했기에 소변이 조금씩 샌다. 서서히는 걸어도 뛰지는 못한다. 아침 5시면 일어나 병원 둘레를 걷는다. 새벽 공기가 상쾌하다. 처음에는 한 바퀴, 두 번째는 두 바퀴, 점점 늘려 하루아침이면 5,000보씩 걸었다. 국민체조도 음악을 틀어놓고 두 번씩 한다. 같이 체조하는 분들과 얼굴도 익히고 농담도 하고 “웃을 준비 하시고 들어보세요.” 하면서 농담을 한다. 모두 오랜 투병 생활에 지치고, 힘들고, 갇혀있는 느낌에 웃음이 별로 없다. 누구든 복도에서 만나면 준비된 농담을 한다. “웃으셨죠? 10년 더 인생 추가로 살 겁니다.” 그러면서 또 웃는다. 아직 이름은 모른다. 몇 호에 있는지도 모른다. 그렇게 몸을 추스르면서 한 달이 지나 5月 25日 병원에 갔다.
수술 후 처음 갔는데, 김석모 교수님의 부드러운 목소리 “좀 어떠세요?” “날아갈 것 같습니다.” “그럼 바로 항암 치료 시작해야겠어요.” “감사합니다.”
5月 26日 채혈, 심전도, X-레이를 찍고, 5月 27日 아침 8시부터 8시간 동안 7개의 수액을 교체해가면서 맞았다. 중간중간 화장실도 가고, 물도 마시면서 잠도 자고 했다. 다시 요양병원에 와서 휴식을 취하는데 2일째부터 항암효과가 나타나기 시작하는데 약을 먹어도 오심, 구토에 대변도 자주 나오지, 큰 고통이 닥쳐왔다. 뇌출혈 수술도 참고 이겨내서 지금껏 12년을 살고 있는데 이 고통은 약하다고 자기 최면을 걸면서 도 닦는 마음으로 버텨도 한밤중에 토하고 화장실 바닥에 주저앉았다. 옆 사람의 도움으로 겨우 침대로 왔다. 아침엔 조금 나아져서 엘리베이터로 식당에 가서 밥을 먹었다. 4개월 동안 방 배식은 하지 않았다. 어떡하든지 식당에 가서 여러 사람과 같이했다. 먼저 온 사람들의 행동을 배워야 하니까.
첫 달은 설명은 들었지만, 너무 아파서 제대로 이해를 못 해 고생했다. 점점 나아지고 두 달째는 간호과장님과 상담을 했다. 그래서 항암 주사 맞기 전날 면역주사를 4개를 맞고 다음 날 전대병원에 가서 8시간 동안 7개 수액을 맞고 다음 날 암 요양병원에서 내게 필요한 수액을 3개를 맞는다. 그러면 훨씬 수월하게 항암 후유증을 이겨낼 수 있고 식사도 잘 할 수 있다. 남들이 보면 머리만 깎지 않았으면 4기 중증 환자라고 믿지 않을 것 같다고 한다. 이 글을 쓰고 있으면서도 어제 6차 항암 주사를 8시간 8개 수액을 맞고 아침에 요양병원에서 수액 3개를 맞는 중에 초고를 쓰느라 지우개 달린 연필을 칼로 깎아가면서 쓰고 있다. 수액 들어가는 것도 간간이 쳐다보면서. 운동 삼아 수액 교체는 간호사실로 천사를 찾아간다.
3차 항암을 끝내고 CT를 찍었는데 그 결과가 너무 좋다. 김석모 교수님께서 “낫는 게 눈에 보인다. 앞으로도 의사 말 따라주세요.” 하시는데 싱글벙글이시다. “네, 누가 아프라고 했습니까? 시킨 대로 해야죠. 감사합니다.” 할머니가 어려서 기억에 자궁암으로 돌아가셨다고 들었다. 대상자라고 해서 채혈 검사에 사인을 하고 검사를 했는데 다행히 유전적인 것이 아니라 자식들은 걱정 안 해도 된다시길래 안도의 한숨을 쉬었다.
내가 갑자기 암 4기 수술이라니 집안에 비상이 걸려서 가족들이 암 검진을 받으러 갔다. 항암이 얼마나 힘든가는 겪어봐야 한다더니 주사를 맞을 때마다 갑자기 여기저기가 아프다. 오심, 구토→발 저림, 춥고 발진에 가려움. 소변이 새어 기저귀를 3일간 한다. 발목이 부스러질 것 같고, 어깨 뼈마디가 아프고 온몸에 털은 다 빠져서 눈을 자꾸 비빈다. 속눈썹도 다 빠진다. 콧속에 털도 다 빠져서 밥 먹을 때 콧물이 계속 나온다. 손톱은 점점 검어지고 발바닥을 방바닥에 놓으면 얼음장같이 차가워진다. 식도가 24시간 쿵쾅거리고 나중엔 통증에 진통제를 맞아야 한다. 입맛은 쓰다 못해 누룽지 탄 맛이 난다. 어떤 음식을 먹어도 다 탄 맛 한가지다. 목구멍만 넘기면 되니까 꼭꼭 씹으면서 내게 오늘 이 음식을 먹게 해 준 세상의 모든 분께 감사하면서 당근채 한 가닥, 양념파쪽도 다 건져 먹는다. 수술 때 56kg이었던 게 3개월 만에 60kg가 되었다.
매일 아침 5시면 일어나 새 물을 떠서 마시고 혈압을 재고 몸무게, 키를 잰다. 키는 매일 다르다. 배를 쭉 펼 수 없기 때문이다. 5,000보 이상 걸으면 힘들다. 병원에 걸어 다녀오면 하루에 10,000보 이상이면 힘들다. 모든 게 자기 체력에 맞게 해야 운동 효과가 있다. 5개월 동안 밖에 나가 본 적이 없이 이 암 요양병원에서만 살았다. 외부음식은 아무리 유혹해도 안 먹었고, 9시에 잠자리에 들고 5시면 일어나 체조를 하고 걸었다. 남들이 의지가 대단하다고 한다. 난 여기에 놀러 온 게 아니라 빨리 낫기 위해서 온 것이니 규칙을 지키면서 최대한 빨리 몸을 추슬러야 한다. 이제 6차 항암이 끝나고 CT를 찍고 3주 후에 결과를 보면 앞으로 내가 갈 방향이 정해지겠지. 다시 새로운 시작이 된다. 도전!
약 2주 전부터 그림을 그리기 시작했다. 역시 중증 환자였다. 선을 그리는데 일직선이 아닌 빨래판처럼 우둘투둘하다. 나도 모르게 손이 떨리는 것이다. 아무리 손에 힘을 주어도 역시다. 다 나으려면 한참의 시간이 필요하나 보다. 오뚜기 인생인데 이 정도쯤이야. 거뜬히 견뎌내지. 약 80장의 그림을 그려서 여기저기 선물을 했다. 이제 미술을 끝내고 전대병원에 갔더니 암 수기 공모가 있어서 없는 글, 솜씨나마 써본다. 누군가는 내 글을 읽고 희망을 가져보길 바라면서. 난 2009년도 7월에 갑자기 쓰러져 뇌출혈 수술을 전대병원에서 받았다. 3일 만에 중환자실에서 깨어났을 때 수액 6개가 주렁주렁, 소변줄은 채워졌고 머리는 빡빡이요, 구토 때문에 백김치에 누룽지만 먹었다. 다 토해도 먹고 또 먹고 이겨냈다. 주성필 교수님 말씀이 “환자가 정신력이 너무 강해서 20년 의사 생활에 이렇게 빨리 완벽하게 낫는 것은 처음이다.” 하셨다. 그리고 1년 후 시신 기증을 했다. 너무 감사한데 딱히 드릴 선물이 없었다. 우리 아버지는 각막 기증을 하셨다.
그리고 난 수술 후에도 대학을 졸업하고 (나이 50세에 대학 입학을 했다) 자격증을 따서 직장생활을 했다. 병원에서 시키는 대로 금지 식품을 철저히 참고 먹지 않았다. 몇 년 뒤 병원에 갔을 땐 피가 10대같이 맑아졌다고 놀라셨다. “아니, 어떻게 관리하셨나요?” “걍 3끼 밥만 먹었는데요.” 규칙적인 생활, 식생활, 긍정적인 생각, 즐거운 마음으로 살았다. 어차피 ‘100세 시대에 100세까지 못 살면 다 명이 짧은 것이다’ 하면서 오늘 하루 즐겁게 만나는 사람과 웃으면서 보내다 보면 하루하루 쌓여서 세월이 가겠지.
오늘도 많은 암 환자들이 힘들게 투병 생활을 하고 계실 것이다. 별난 인생을 사는 나는 나이 오십에 대학을 졸업하고 뇌출혈 수술을 이겨내고 다시 12년 후에 암 4기 수술을 하면서도 겉으로 보기엔 전혀 환자 같지 않다고 한다. 힘들어도 웃고, 또 웃고, 좋은 생각만 하면서, 남을 배려하면서 힘차게 살아봐요. 파이팅!
끝까지 읽어 주셔서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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