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전체메뉴닫기

바로가기 서비스

암 희망 수기

[암 희망 수기 8회] 지금도 순창을 지나가면 눈물이 난다

2023-03-06 20:14

글쓴이 : 김*종

 “형님, 오실 때 점심 먹지 말고 그냥 오세요.”
 “그래 알았다.”

 그러나 전화를 끊고 화순에 있는 병원을 가려고 준비하는 내 가슴은 쥐어짠다. 한 시간 반 정도 운전을 하는 동안 이런저런 생각으로 말이 없던 나를 향해 애 엄마가 “왜 그래, 여기서는 그래도 병원에 가서는 이러지 마… 당신 눈치 보게 하지마. 당신 얼굴에 다 나타나고 있어 거짓이라도 밝은 얼굴로 대해 주었으면 해”, “특히 의사선생님 만나고 나올 때마다 의식적으로 표정 관리 잘해 모두가 당신 얼굴만 쳐다보고 짐작하니까” 생각해 보니 애 엄마한테는 말을 해야 될 것 같았다.

 전화가 왔는데 점심 먹지 말고 오라고 하네. 그 전화 받고 대답을 어떻게 해야 할지 몰랐네. 왜 그런 전화를 했는지도 혼란스럽네. 제수씨한테 연락 왔었나? 아내 역시 말이 없다.
 동생은 후두암이다. 지금 음식물을 직접 먹지 못하고 튜브를 달고 있다. 병원에 가면 목에서부터 가늘게 연결된 투명한 튜브가 그렇게도 보기 싫었다. 투병 중에 먹지 못하고 고통받는 환자와 그것을 지켜보는 가족들은 이루 말할 수 없는 괴로움의 연속이었다.
 병은 오기 전에 지켜야지 왔을 때는 용서를 안 해주는 것 같았다. 그러나 어찌하겠는가? 대신해 줄 것은 모두가 이겨내도록 기도하고 사랑해 줄 수밖에 없지 않은가? 다 필요 없을 것 같다. 
 오늘은 내가 오전은 네가 대신 아플 수는 없다.

 우리 아버지는 7년 전에 자전거 사고로 뇌출혈이 심해 7개월 만에 돌아가셨다. 5대 독자였던 아버지는 항상 우리는 외로우니까 가급적 멀리 떠나지 말고 가까운 거리에서 살았으면 하셨다. 

 “나는 너희 두 형제를 보면 항상 든든하다.”
 “몇 안 되는 형제끼리 욕심내지 말아라.”

 아버지는 서로 사는 동안 욕심내지 말라면서 옛날 어느 형제 이야기처럼 밤에 몰래 볏짚을 서로 가져다 놓았다는 이야기를 여러 번 하셨다. 2남 2녀인 우리들은 그 마음을 아니까 노력했었으나 시집간 여동생들은 광주에서, 서울에서 살고 있다.

 동생은 낚시를 무척 좋아했다. 그러다 보니 맵고 짠 음식을 즐겨 했다. 특히 국물을 어찌나 좋아하는지 어머니는 싱겁게 음식을 해도 동생은 꼭 자기 식성대로 간을 맞추어 먹곤 했다. 동생의 경우 처음에는 기침을 자주 하고 목소리도 쉰 소리가 오래 걸렸지만, 감기 정도로 알고 대수롭지 않게 대처한 것이 지금의 화를 자초한 것이다. 점심 먹지 말고 오라는 동생은 옛 생각이 나서 자리를 원했던 것이었다.

 지금도 순창을 지나면 아니 가까이만 가도 눈물이 난다. 내가 대신해 줄 수 없는 일 중에 먹일 수 없는 내 자신이 한없이 원망스럽고 지난 일에 죄스럽고 미안하기만 했었다.

 “형님, 그러지 말고 다대기를 듬뿍 넣어야 제맛인데… 엄마 건더기 많지, 많으면 공기 뚜껑에다 덜어요. 국물 식으면 맛없으니까 지금 따끈했을 때 마셔요…”
 
 이걸 계속 먹어야 할지 그렇다고 수저를 놓아야 할지 벅차오르는 아픔의 눈물 참을 수도 없었다. 먹는 모습을 지켜보면서 옛날 생각하고 자기 맛을 상상하면서 내뱉은 말은 모두를 가슴 아프게 했다.
 이런 가운데 말없이 남편이 하라는 그대로 하는 제수씨는 빙그레 웃으면서 “시숙님~ 동생 하라는 대로 해보세요. 말대로 하면 정말 맛있어요” 추임새를 넣은 것인지 마음을 다스리려고 그러는지 정말 동생 말대로 제수씨는 행동으로 옮기고 있었다.
 그런 모습, 그런 장면들이 지금껏 나를 짓누르고 있다. 얼마나 먹고 싶었으면 병원복을 입고 우리들을 여기까지 오자고 했을까? 나는 지금도 자문하고 있다. 먹고 싶었을까? 사주고 싶었을까?

 말이 없던 어머니는 양을 너무 많이 주어서 다 못 먹겠다며 수저를 놓으면서 동생에게 “환자복이라도 바꾸어 입고 올 걸 그랬다. 나는 어디 가는 줄도 모르고 그냥 바람 쐬러 나오는 줄 알았다.” 아마 어머니께서도 같은 마음이었으리라 짐작했다. 오는 길에 화순 만연산 고개를 넘어 치유의 숲도 들렀었다.

 돌이켜보면 동생은 술 담배를 좋아했다. 그것도 술을 많이 좋아했다. 형인 나는 어머니가 위암, 대장암으로 수술을 했기에 반복되는 잔소리를 모질게 했었다. 여동생이 자궁경구암 판정을 받았을 때 같은 내용으로 판정받은 어머니는 내가 무슨 죄를 지었기에 이러는지 모르겠다며 한숨을 쉬셨다.
 그래도 둘째들은 이렇지만, 다행히도 첫째들은 아직 이런 일이 없으니까 조심 조심들 하거라 하셨던 어머니께서는 자식을 먼저 보내고 2년 전에 아버지 그리고 동생한테 가셨다. 바라건대 그곳에서는 아픈 일 없었으면 한다. 병원 생활을 많이 하셨기 때문에 더욱 그렇다. 그곳에서라도 건강하셔서 아버지 동생 성가시게 안 했으면 한다.

 우리 어머니는 인간문화재? 라고 자랑 아닌 자랑? 했었던 기억이 난다. 첫 번째는 위암 수술 · 재발 수술 · 대장암 수술 · 자궁경구암 수술 · 화상 수술 그러고도 85세 돌아가셨으니 대단한 분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나는 확신을 하는데 어머니께서는 부엌에서 부주의로 화상을 입었던 그때, 심한 화상 덕분에 그 열에 의해 암세포들이 다 죽었나 하는 생각이 들어 식구끼리 모인 자리에서 회자되곤 한다.

 나는 병원에서 수술 전 서약서에 서명하라고 하면 부정적인 생각을 가졌던 게 한두 번이 아니었다. 일가친척이 없던 나에게 그러한 기회 아닌 서명 기회가 많았기 때문이다. 왜 수술 전 이런 절차를 꼬오옥 밟을까? 내용 또한 결과에 따라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전혀 없었기 때문이기도 했다. 그리고 나는 제일 싫고 대답하기 싫은 게 병원에 가면 심지어 건강검진을 해도 가족력을 물으면 대답하기도 그렇고 쓰기도 싫다. 어떤 때는 창피하기도 했다. 그러나 행여 검사 결과에 참고가 되리라는 생각으로 대답도 하고 기록도 꼬박꼬박하긴 한다. 나는 개인적으로 가족력 존재를 믿는다. 왜냐하면 같은 음식을 먹고 비슷한 생활공간에서 수많은 시간을 같이 거쳐 왔기에 결과도 같을 거라는 생각이 들기 때문이다. 그래서 조심하고 내 아이들한테도 같은 말을 반복하고 있다.
 남동생 경우도 제수씨는 나에게 물었었다. “시숙님 어떻게 할까요?” 나는 조카들 다 모이라고 하세요. 그 자리에서 같이 이야기합시다. 동생에 관한 서약서를 내 손으로 서명하기 싫었다. 이런 일은 내가 할 일이 아니기 때문이었다. 더욱이 하던 치료를 중지하면 멀리 가야 한다는데 이제 50을 조금 넘겼는데 어떻게 그걸 내 손으로 결정할 수는 더욱 없었다.

 동생은 1남 2녀를 두었다. 동생 부부 다 우리들이 본받을 정도로 아이들에게 정성을 다 쏟아부은 사람들이기에 필요한 절차였다. 지난날 수술 서명하고는 전혀 다른 차원이기에 더욱 그러했다. 어머니와 함께 다 모인 17명에게, 결정을 해야 할 시기에 도달했는가 본데 제수씨가 어떻게 해야 하는지 묻는데, 상황을 짐작하고 이런 자리를 갖게 되었다는 말을 전하고, 동생 식구들에게는 ‘우리가 자리를 비울 테니 의논해서 결정하기를 바란다.’ ‘이런 결정은 그 누구도 할 수 없고 엄마랑 같이 냉정하게 생각해서 판단하거라’ 하고 우리들은 모두 나와서 다음 일을 의논했었다.
 조카 셋이 와서 “큰아빠, 아빠 아픈 모습 덜 보고 더 아픈 시간 줄였으면 해요” 껴안고 우는 조카들의 모습 내가 해줄 위로는 아무것도 없었다.

 막내 여동생의 노력으로 아버지가 계시는 성당묘지 다섯 발자국 옆 아래쪽에 아빠랑 같이 있으면 좋아할 것이라고 장소를 선정했다고 했다. 나중에 들은 이야기지만 아버지가 돌아가셨을 때 이런 곳에 계시면 좋겠다는 작은 오빠 말을 기억해서 오빠도 좋아할 것 같아. 이곳을 택했다 하였다. 지금 생각해도 참 잘한 것 같다.

 나도 부정맥(서맥)으로 인공심장박동기를 달고 생활한 지 8년째이다. 전지 수명이 다 되어 수술도 해야 할 시기만 기다리고 있다. 정기검진차 심혈관 병동으로 자주 가는 길에, 환자운반차에 실려 오가는 여러 현장 모습을 보면 지나간 많은 일들이 생각나곤 한다.
 얼마나 긴박할까? 얼마나 힘들까? 걱정되면서도 환자 얼굴을 보면….

 “형님, 나 멋진 계획이 완성될 것 같습니다. 곧 보여 드릴게요”

 멀리 가는 줄 알았기에 동생은 두 딸이 걱정되어 방이 4개 있는 아파트를 구하려고 했던 것이었다. 가기 전에 걱정을 덜려고 아픈 몸을 이끌면서 제수씨와 열심히 여기저기 다녔다는 얘기를 전해 듣고 ‘자식 그래도 할 일은 했구나’. 지금도 동생 집에 가면 내가 먼저 눈물을 흘리는 경우가 많다. 그때마다 조카들은 “큰아빠! 동생 생각이 나서 그래요???” 동생은 이 집에 그렇게 한번 오고 싶었는데 오지 못하고 멀리 갔기 때문이다.
 동생은 멀리 가기 며칠 전에도 “형님 퇴원해서 집에 갈래요” 했었다. “집에 가면 안 될까요?” ‘왜 안 되겠냐 의사선생님한테 의논해 보자’

 나는 가족은 물론 주변 사람들에게 말하곤 한다. 다 필요 없다. ‘무엇이 중요한디…’, ‘건강검진을 소홀하게 생각하지 말고, 이왕이면 종합검진도 항상 당면과제로 여기고 년 초에는 검진계획을 반드시 세워라!’, ‘몸이 조금만 이상해도 병원을 가까이해라’ ‘가족력을 절대 무시하지 말자!’

 동생은 환자복을 입고 메타세쿼이아 길을 걸으면서 참 좋아했었다. 우리는 함께 제사를 지내면서 꼬~옥 앨범 속 옛 사진을 보고 울고 웃는다. 지금도 담양 메타세쿼이아 길을 지나 순창이 가까워지면 잊을 수 없는 그 날이 생각나서 눈물이 난다.


#암 치료 후기 #치료 후기 #암

 

목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