암 희망 수기
[암 희망 수기 8회] 소녀처럼 예쁜 우리 엄마
2023-03-06 21:04
글쓴이 : 이*현
평소와 다를 거 없었던 그 날은 엄마의 건강검진 결과가 나오는 날이었습니다.
학교를 마치고 집에 오는 길에 엄마에게 전화가 걸려 왔습니다. 울먹이며 떨리는 목소리로 유방암 2기라는 말을 하였습니다. 그 순간, 혼자서 그 소식을 들으러 병원에 간 엄마가 얼마나 외롭고 무서웠을지 걱정이 되어서 눈물이 흘렀습니다. 집에 가보니 역시나 엄마가 서럽게 울고 있었습니다. 저는 애써 담담한 척 불안해하는 엄마를 안심시키려 하였으나 사실 눈앞이 캄캄했습니다.
작년에 건강검진을 받았어야 했지만, 엄마가 일하느라 너무 바빠서 그 시간을 놓쳤던 것 같아 본인 스스로도 후회를 하셨습니다. 평소 아픈 곳 하나 없었던 엄마였기에 나 또한 너무 안일하게 생각하고 무관심했던 것 같아 너무 죄송한 마음이 들었습니다. 도대체 왜 우리 엄마에게 이런 일이 일어났는지 처음에는 막막하고 아무도 없는 곳에서 밤마다 눈물만 흘렸지만, 정신을 똑바로 차려야겠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평소 엄마 앞에서는 절대 눈물 한 방울 보이지 못하는 씩씩한 큰 딸이기에 엄마 옆에서 내가 끝까지 힘이 되어야겠다는 마음을 강하게 먹었습니다.
보통은 한쪽에 암이 생기는데 엄마는 양쪽에 암이 있다고 하였습니다. 수술복을 입고 수술실로 들어가는 모습이 어찌나 왜소하고 작게만 느껴지는지 처음 보는 엄마의 모습이었습니다. 수술 시간만 2시간이 걸렸습니다. 예상한 것보다 늦어지는 시간에 자꾸만 불안하고 초조해서 시간이 느리게만 느껴졌습니다. 수술이 끝나고 나온 엄마는 매우 아파하며 저의 얼굴을 보고 눈물을 흘렸습니다.
엄마는 유방암 수술을 하고 나서 식습관부터 생활 습관 전부를 바꾸었습니다. 저 또한 일상 속에서 포기하게 되는 것들이 많았습니다. 엄마와 오래 함께하기 위해서라면 기꺼이 뭐든 다 할 생각뿐이었습니다. 주변 지인들의 말로 암 요양병원에 가서 며칠 지내면서 쉬다 오면 좋다는 말에 우리 또한 병원 바로 옆 요양병원에서 엄마가 지내기로 하였습니다. 그러나 엄마는 가족과 떨어져서 혼자서 답답하고 작은 병실에서 잠을 잘 수가 없었습니다. 숨이 쉬어지지 않는다고 울면서 요양병원에 간 첫날 밤에 전화가 왔습니다. 아빠와 동생 그리고 저는 놀라서 곧장 엄마를 다시 집으로 모셔왔습니다.
가족 중에서 매일 엄마 옆에 있어 줄 수 있는 사람은 저라고 생각하였기 때문에 저는 4학년 2학기 대학교 휴학을 하게 되었습니다. 학교는 얼마든지 다닐 수 있지만, 엄마와 함께할 수 있는 시간이 얼마나 남았는지는 그 누구도 알 수 없었기 때문입니다.
친구들과의 약속이 일상이었던 저는 매일 눈뜨면 엄마와 함께 운동을 하고 집안일을 하는 것으로 일상이 바뀌었습니다. 빨래부터 청소, 요리까지 처음 해보는 일들이 많았고 실수투성이였습니다. 그동안 이 모든 걸 엄마 혼자 하셨다는 것에 죄송한 마음이 들었습니다. 엄마가 없다면 우리 가족은 존재할 수 없을 것 같다는 생각에 엄마의 소중함을 더더욱 느꼈습니다. 물론 엄마의 역할을 대신하는 것이 처음에는 힘이 들었지만, 엄마가 겪고 있는 아픔과 고통에 비하면 전혀 아무것도 아니었습니다. 오히려 엄마와 함께하는 그 시간들이 너무나 소중하고 행복했습니다.
항암치료를 시작하기에 앞서 남아있는 시간 동안 체력을 기르기 위해 오전과 오후 2번씩 엄마 손을 잡고 함께 등산을 하고 대화도 많이 나눴습니다.
유방암은 평생 살이 찌면 절대 안 된다고 하였기 때문에 엄마는 2달이라는 짧은 기간 만에 8kg가량 감량하였습니다. 그렇게 우리에게 다가온 힘든 시간들을 긍정적으로 생각하기로 마음먹었습니다. 그동안 너무 바쁘게 살아왔기 때문에 이제는 조금 쉬어가라는 의미로 암이라는 존재가 찾아왔다고 생각하기로 하였습니다.
그러나 항암치료는 역시 쉽지 않았습니다. 엄마는 첫 항암 이후 일주일이 지나서 고열이 나고 열이 떨어지지 않았습니다. 아무리 물수건으로 열을 내리려고 해도 열이 38도를 넘어섰기에 응급실로 바로 향하였습니다. 첫 항암이라 예상하지 못했던 일이었고 호중구 수치가 100으로 떨어지는 위험한 상황이었습니다.
아빠가 회사를 며칠 쉬고 집과 병원을 오가며 엄마와 함께 병원에서 생활을 하였습니다. 결국 호중구 수치를 올리는 주사를 맞았고 그로 인해 허리가 끊어 질 듯한 고통을 겪고 엄마는 눈물을 흘렸습니다. 엄마는 늘 강하다는 생각을 하였는데 살면서 가장 많은 눈물을 보았습니다. 그러면서 우리를 힘들게 해서 미안하다는 말을 자주 하였는데 그 말이 더 마음이 아팠습니다.
내가 힘든 건 백번이든 천 번이든 할 수 있지만, 엄마가 힘든 걸 지켜보는 건 마음이 찢어지는 슬픔이었습니다. 엄마의 고통을 대신해 줄 수도 없는 현실이 너무나 힘들었지만 할 수 있는 최선의 일은 그저 옆에서 묵묵히 있어 주는 것뿐이었습니다. 응급실에 있는 동안에는 밤새 쉬지 않고 엄마를 살피셨던 간호사분들의 친절한 말 한마디와 의료진들의 정성 가득한 보살핌이 너무나 큰 의지가 되었습니다. 환자를 정말 가족처럼 대해주시는 의료진들의 따뜻한 마음에 감사함을 느꼈고 병원에서 지내는 동안 저희는 그들을 믿고 위로를 받았습니다. 엄마는 덕분에 편안한 마음으로 걱정 없이 잘 회복하였다고 했습니다.
그렇게 1차 항암 후 역시나 탈모 부작용이 찾아왔습니다. 홀로 미용실에 가서 머리를 밀고 왔다며 영상통화를 해서 보여주었습니다. 엄마는 스스로 부끄러워하며 어색해하기도 했지만, 저의 눈에는 소녀처럼 너무나 예쁜 엄마의 모습이었습니다. 애써 웃으며 저에게 괜찮은 척하였지만, 엄마의 눈에 맺힌 눈물을 보고 안쓰러웠습니다. 오히려 머리카락이 없어서 편하고 좋다는 그 말이 더욱 슬프게 들렸습니다. 저도 같은 여자이기에 머리를 민다는 건 정말 쉽지 않은 것을 알아서 엄마의 마음이 이해가 되었습니다. 그래도 언제 살면서 머리를 밀어 보겠냐며 긍정적인 생각을 하는 엄마의 모습이 위대해 보이기도 했습니다.
3주 간격으로 지속되는 항암치료 기간 동안 주사실로 들어가서 빨간 약물을 보는 것만으로도 구토를 하였고, 이는 항암치료가 거듭될 때마다 횟수가 늘어갔습니다. 주사실로 향하는 기분은 마치 도살장에 끌려가는 것처럼 무섭고 끔찍하다고 하였으며 몸은 점점 힘들어지고 물을 삼키는 것조차 힘들어하였습니다. 아빠와 저는 어떻게 해야 엄마가 조금이라도 먹을 수 있을지 정말 많은 자료들을 찾아보고 연구도 하였습니다.
더운 여름날 뜨거운 누룽지를 끓여보기도 하고 먹지 못하는 엄마를 위해 음식을 갈아서 만들어 보기도 하였습니다. 하지만 음식 냄새조차 힘들어해서 모든 음식을 거부하고 먹을 시도조차 하지 못했습니다. 시간이 지나면서 아빠와 동생 그리고 저의 노력을 보고 억지로라도 먹고 토를 하면서도 먹었습니다. 속 울렁거림과 구토 방지약을 처방해주었으나 엄마는 약을 먹는 것조차 하지 못하였습니다. 저와 아빠는 제발 약 한 번만 먹어달라고, 그래야 살 수 있다고, 버틸 수 있다고 애원하였습니다.
모든 것이 뜻대로 되지 않고 가족 모두가 눈물의 하루하루를 보냈습니다. 평소 엄마는 먹는 것을 좋아하는 사람이었고 본인 스스로도 잘 먹고 싶었지만 배는 고파도 속에서 거부 반응이 자꾸 일어나서 매우 고통스러워하였습니다. 늘 창밖을 바라보며 언제쯤이면 지나가는 사람들처럼 평범하게 생활을 할 수 있을지, 그들이 너무 부럽다며 그저 눈물만 흘렸던 엄마를 보았습니다.
마지막 항암 주사 때는 3일 내내 아무것도 먹지 못하고 구토만 하였습니다. 항암치료를 할수록 갈라지고 검게 변하는 엄마의 손발톱이 부디 빠지지만 않게 해달라고 기도를 하며 밤마다 약을 발라주었습니다. 저의 기도가 하늘에 닿았는지 다행히도 손발톱은 빠지지 않고 항암치료 기간 동안 잘 버텨주었습니다.
그렇게 몇 달의 항암치료가 지속되었고 엄마는 친정에 가고 싶어도 오랜 기간 동안 가지 못하였습니다. 걱정이 되신 외할머니는 종종 주말에 오셔서 엄마가 어릴 적부터 좋아했던 음식을 가져오시곤 하였습니다. 놀라웠던 건 할머니가 해주신 반찬들은 엄마가 다 잘 먹을 수 있겠다며 조금씩이라도 다 먹었다는 것입니다. 이렇게 가족 모두가 노력한 덕분인지 엄마가 힘은 들지라도 점점 치료에 적극적인 의지를 가지고 임하였습니다. 나이가 드신 외할머니는 자식을 걱정하고 몸이 아픈 엄마는 먼 걸음 하신 할머니를 더 걱정하셨습니다. 이번 추석에는 엄마를 대신해서 아빠와 단둘이 외할아버지 산소에 다녀왔습니다. 저희는 엄마가 부디 아프지 않게 해달라고 부디 치료 잘 마무리 할 수 있게 해달라고 기도하였습니다. 엄마가 오래오래 제 옆에서 함께 할 수 있게 해달라고 기도하였습니다.
약 6개월간의 항암치료 기간이 끝난 지금 모든 게 바뀌었습니다. 운동을 자주 하지 않았던 우리 가족은 모두가 하루에 한 시간씩 걷기 운동을 시작하였습니다. 엄마와 늘 함께 있는 저는 등산도 같이하고 걷기를 생활화하고 있습니다. 엄마 덕분에 함께 건강한 삶을 살기 위해 노력할 수 있어서 소중한 하루하루를 보내고 있습니다. 단지 건강검진을 조금만 더 빨리했더라면 어땠을까 하는 아쉬움이 많이 남습니다. 따라서 주변 사람들에게 건강검진을 꼭 받으라고 권유하고 주변인들의 건강도 챙기고 있습니다.
엄마는 이제 모든 것에 감사하며 긍정적인 마음으로 세상을 바라본다고 하였습니다. 그동안 본인 스스로에게 소홀했던 것에 대해 생각해보며 지난 삶을 돌아보는 시간도 가졌습니다. 암을 판정받고 힘든 항암치료를 끝낸 지금, 그 기간이 어떻게 지나갔는지 모르겠지만 분명한 건 끝은 있다는 것입니다.
많은 것을 잃은 만큼 얻은 것도 많이 있습니다. 건강은 건강할 때 챙겨야 한다는 것, 가족과 함께할 수 있는 시간에 최선을 다해야 한다는 것, 그리고 지금도 환자를 살리기 위해 밤낮없이 고생하고 계시는 의료진분들이 계신다는 것에 감사합니다. 환자분들은 그들의 따뜻한 미소와 말 한마디에 안정감을 느끼고 위안을 많이 받습니다.
앞으로 몇 번의 방사선 치료를 해야 할지 아직 모르겠지만 남아있는 치료들도 잘 마무리해서 내년에는 꼭 가족여행을 가고 싶습니다. 드디어 머리카락을 기를 수 있다며 좋아하는 엄마의 모습이 영락없는 소녀의 모습입니다. 예쁘게 머리도 기르고 그동안 못한 화장도 하고 내년에 동생 군대 가기 전에 가족사진 한 장 찍는 것이 저의 소소한 바램입니다. 그동안 힘든 치료들 포기하지 않고 씩씩하게 잘 견뎌줘서 자랑스러운 저의 엄마입니다. 23년간 키워주시고 제 옆에서 든든하게 있어 줘서 감사하고 앞으로는 내가 엄마 옆에서 평생을 든든하게 지켜 줄게요. 늙어서도 지금처럼 엄마와 친구 같은 딸로 함께 살 테니 오래오래 옆에 있어 주세요.
세상에서 제일 예쁘고 자랑스러운 우리 엄마, 세상 누구보다 제일 소중하고 사랑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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