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암 희망 수기

[암 희망 수기 8회] 사랑하는 할머니께

2023-03-06 21:40

글쓴이 : 정*선

 그날은 정말 눈에서 물이 뚝뚝 떨어지더라고요. 수업에 늦어서 헐레벌떡 버스에서 내려 장소로 달려가는데 연락을 받았습니다. 위내시경을 받으신 할머니의 종양 모양이 좋지 않다고, 전대 병원으로 가고 있다고, 선생님이 암처럼 보인다고 말씀하셨다고. 수업을 가다 멈춰서서 한동안 멍했습니다. 제 세상이 무너지는 것만 같았습니다. 세상에서 가장 사랑하는 할머니가 이렇게 아프실 거라고 전혀 생각하지 못했거든요.
 
 저는 할머니 손에서 컸습니다. 맞벌이로, 또 오랜 기간 기러기 부부로 살아온 저희 부모님이 바쁘실 때 항상 제 곁에는 할머니, 할아버지가 계셨거든요. 저녁을 먹고 엄마 방에서 선잠을 자다 깨, 할머니가 계신 방으로 이불을 질질 끌고 넘어갈 때면 그 칠흑 같은 어둠 속 거실이 그렇게나 길고 무섭게 느껴졌는지. 한 손으로 나이를 세서 보여줄 수 있었던 그때에도, ‘사랑’이 무엇인지 잘 알지 못하면서도 날 사랑하는 할머니를 너무 잘 느낄 수 있었습니다. 그래서 그렇게 할머니를 졸졸 따라다녔는지 몰라요. 화장실이며, 음식물 쓰레기를 버리러 나가시던 밖이며, 심지어 새벽예배까지요. 가면 할머니가 만들어주신 방석 이불에 누워 할머니 무릎을 베고 잠들었던 것, 겨울에 혹여 추울까 교회 앞 편의점에서 사주신 호빵을 호호 불며 먹던 것, 걱정하신 할머니가 나를 두고 새벽예배에 나가시자 나 두고 가면 안 된다고 두 손을 맞잡고 끈으로 칭칭 감고 잤지만, 아침에 일어나니 내 손만 남아 보고 울었던 것. 저는 이처럼 저마다 다른 모습의 사랑을 기억합니다.

 아빠의 일 때문에 타지로 이사를 해 학교에 다니기 시작하던 8살 때에도, 늦은 시간까지 엄마·아빠를 기다리던 저희 자매가 걱정되신 할머니는 몇 개월간 저희 걱정만 하시다가 몇십 년간 살아온 광주에서 아는 사람 하나 없는 인천으로 이사를 해오셨습니다. 엄마, 아빠께서는 인천에서 살던 이때가 물질적으로 가장 힘들었다고 하시지만 저는 할머니 할아버지 덕분에 초등학교 이 시절 그런 건 하나도 모르고 자랐습니다. 잠깐 살던 아파트에서 할머니, 할아버지와 살 주택으로 넘어와서 생긴 수많은 식물들의 개수를 세기 바빴고 빨갛게 익은 방울토마토를 따주시는 할머니 옆에서 받아먹기 바빴으며 할아버지 자전거 뒷자리에 타서 학교를 오가며 그 풍경들을 구경하기 바빴거든요. 항상 잘한다. 잘한다. 칭찬하고 내 말이면 같은 말을 3번씩 해도 항상 처음 듣는 것처럼 반응해주시는 할머니 덕분에 자신감 있고 당찬 어린이로 클 수 있었습니다. 저는 나중에야 제가 똑같은 말을 몇 번씩 하고 있구나… 이게 다른 사람들은 별로 좋아하지 않구나… 깨닫긴 했지만요.

 그래서 어쩌면 당연하게 어렸을 때부터 ‘사랑하는 사람!’ 하면 할머니를 가장 먼저 말했습니다. 그렇게 할머니를 졸졸 따라다니던 꼬맹이가 어엿한 성인으로 대학교에 다닐 때까지 참 많이 크는 동안, 우리 할머니에게도 시간은 같이 흘렀던 것이겠지요. 점점 허리가 굽어지시는 할머니를 보며 마음이 안 좋았지만 그래도, 이렇게 큰 병으로 아프실 줄은 전혀 생각하지 못했나 봅니다. 그래서 처음 소식을 듣고 그렇게 무너졌나 봐요.

 그로부터 벌써 5개월이 지나고 지난 추석, 처음 맞는 명절에 외가 가족들이 다 할머니네에 모였습니다. 그동안 많은 일이 있었습니다. 수술에 들어가 열어 본 할머니의 위 상태가 심각했고, 또 아래까지 전이가 되어 있어 결국 수술을 하지 못하고 항암을 시작하셨고 이에 맞춰 가족들의 생활이 달라졌습니다. 엄마는 일을 정리하시고 할머니 옆에서 간병을 시작하셨고 이모와 삼촌 모두 바쁜 직장생활을 병행하면서도 온 중심을 할머니께 두셨습니다. 이번 추석은 튜브를 통해 영양분을 공급받으시고 입으로는 음식을 소화하지 못하시는 할머니를 위해 명절이지만 우리끼리 음식도 간소하게, 어서 먹고 치우는 식으로 며칠을 보냈습니다. 그렇지만 그런 것은 아무 문제도 되지 않았습니다. 삼촌네, 이모네, 우리 가족과 할머니 할아버지 모두가 함께할 수 있다는 그 자체가 너무나 큰 행복이었거든요. 매일 아침저녁으로 할머니의 운동을 위해 나가는 산책에서 누가 할머니 손을 잡고 갈 것이냐로 조금 신경전이 있었지만, 결국 쟁취해 할머니를 부축하고 나간 그 날 저녁에서 장대로 밤 따는 동생들과 엄마, 삼촌을 뒤에서 조금 떨어져 보며 할머니와 웃을 수 있어서 정말 행복했습니다. 

 처음에는 왜 나에게 이런 일이, 하고 절망하시며 자리에서 일어나지 않으시던 할머니가 이렇게 힘을 내시기까지. 처음에 6개월을 말하던 병원. 하지만 전대 병원에서 처음에 정말 좋은 의사 선생님을 만나 ‘할 수 있다’라는 희망을 가지고 암과 맞서 싸우시게 되시기까지 정말 감사한 일이 많습니다. 

 제가 가장 감사한 것은 할머니 본인의 의지이십니다. 젊은 사람들도 정말 힘들어하는 항암을 벌써 8차까지 마치시고 잘 이겨내고 계십니다. 어제도 옆에서 간병하시는 엄마에게서 온 사진을 보고 너무나도 벅차올랐습니다. 노란 항암제를 맞으시면서 너무도 힘든 몸을 이끌고도 병원 복도를 걸으시며 운동하시는 모습. 이 장면은 제가 앞으로 살아가면서 정말 힘들 때 두고두고 꺼내 볼 장면이 될 것 같습니다.

 처음엔 정말 우리 모두 왜 사랑하는 할머니에게 이런 일이, 하고 무너졌지만, 또 이렇게 함께 이겨내며 많은 것들을 배우는 중입니다. 우리는 서로 사랑하는 법을 배웁니다. 집에 환자가 생기면 간병도 힘들고 서로 감정적으로 다치는 부분이 많다고 익히 들었지만, 저희 가정은 할머니는 구심점으로 더욱더 모일 수 있었습니다. 일을 그만두고 할머니 옆을 지키는 엄마를 걱정하며 함께하는 이모, 삼촌들. 엄마의 빈자리를 채우며 당분간 가사를 맡은 큰 조카까지도 고맙다, 미안하다 하시며 감동을 주십니다. 또 우리는 할머니와 함께하는 이 순간순간이 얼마나 귀하고 행복한 시간인지 배웁니다. 세상 다른 어떤 가치들보다 이런 사랑이 가장 귀함을 느낍니다. 

 지금도 내가 무엇이길래 이런 사랑을 받을까, 하며 눈물을 훔치시는 할머니는 당신은 제가 아는 모든 사람들 중에 가장 사랑스럽고, 또 사랑받기에 마땅한 분입니다. 이건 어쩌면 제가 할머니께 보내는 긴 러브레터일지 몰라요. 사랑하는 할머니, 어렸을 때 할머니 옆에서 잠들며 손가락을 걸며 했던 약속 제가 다 지킬 수 있도록 오래오래 행복하게 함께해주세요.

 우리 다 이겨보아요!! 사랑합니다, 큰손녀가 많이많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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