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전체메뉴닫기

바로가기 서비스

암 희망 수기

[암 희망 수기 10회] 때 이른 시련은 나를 더 단단하게 만들기에

2025-01-08 15:53

글쓴이 : 김*영
 24살 11월,
 다가올 겨울의 시작을 알리는 찬바람 속에서 취업 면접을 보러 다녔던 기억이 아직도 생생하다. 졸업을 한차례 미뤘고, 계속되는 탈락에 머릿속에는 취업에 대한 압박과 스트레스가 시간이 흐르는 순간보다도 더 빠르게 쌓여갔다. 극심한 불안이 내 의식을 잠식했지만, 그것들을 빌미로 나는 나를 더 괴롭히며 목표를 위한 채찍질을 멈추지 않았다.
 내 마음과 몸은 점점 지쳐가며 5평 남짓의 좁은 방 안에서 밖으로 나가지 못했다. 억지로 일으켜 세워도 힘이 나지 않았다. 어딘가 무기력했고, 내 몸이 아닌 것만 같았다. 취업 준비를 하는 사람이라면 응당 누구나 힘든 것임을 알고 있었음에도 그때는 제대로 되는 것이 없었다. 오로지 기계적으로 행동하지 못하는 내 몸과 정신을 미워하기 바빴다.

 그날은 단칸방의 안락함과 쌀쌀한 바람을 뚫고 간 도서관에서의 공부를 마친 직후였다. 무겁게 가져온 가방을 어깨에 메고 집에 가려던 찰나, 어딘가 끊어지는 듯한 통증이 몸을 찌르는 듯했다. 일시적일 것이라는 짐작과 달리 아픔은 5일 내내 지속되었고, 생경한 감각에 몸의 신경이 곤두섰다. 별거 아닐 거란 추측과 함께 병원 일정을 생각하고 있을 때 거울 속, 눈에 띈 쇄골 부근의 흔적이 나를 사로잡았다. 천천히 그곳에 손을 갖다 대자 무언가 물렁한 감촉의 이물감이 느껴졌다. 등골이 오싹해지면서 본능적인 싸함이 온몸을 스쳤다. 결코 가벼운 것이 아님을, 몸에 무언가 이상이 생겼음을 그제야 알아차렸다. 

 날이 밝자마자 뛰어간 1차 병원에서는 악성 종양 의심 진단을 받았고, 연계된 2차 병원에서는 종격동 림프종 2기라는 악성 암 판정이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미만성 거대b세포 림프종’이라는 병명을 제외하고 의사의 목소리가 잘 들리지 않았다. 판결을 하는 판사처럼 병명을 고지하는 의사의 차분한 목소리와 달리 내 몸은 모든 기관의 작동을 멈춘 것 같았다. 그건 일종의 방어기제였다. 쏟아내선 안 되는 눈물을 참기 위해, 무너지지 않기 위해. 억지로 고개를 움직여 겨우 옆을 본 순간, 같은 결과를 들은 엄마의 일그러진 얼굴이 눈에 들어왔다. 떨리는 목소리를 주체하지 못한 채 눈물만 쏟아내는 애처로운 그 모습에 그때 서야 정신을 차렸다. 그리고 그날따라 작아 보이는 엄마의 손을 꼭 쥐며 다짐했다. 이 병에서 반드시 나을 것이라고.

 그때의 감정을 형용할 수 있을까.
 좋은 체력과 건강한 몸으로 살아온 내게 예고 없이 찾아온 재앙과도 같았다. 재앙이 덮친 뒤 폐허가 된 마을처럼 내 마음도 처참히 무너졌다. 충격적인 소식에 우리 가족은 그 누구도 흘러내리는 눈물을 참을 수 없었다. 그리고 나조차도 눈에서 흐르는 것을 잠그기에는 너무 큰 아픔이 쉼 없이 몰아쳤다. 참혹함과 패배감이라는 쓰디쓴 감정과 함께 2023년의 초겨울이 시작되었다. 
 치료가 결정된 이후부터는 일사천리로 진행되었다. CT 검사부터 MRI, 피검사 등 몇 차례의 검사를 마친 뒤 몸속에 바늘을 박아 넣었다. 구멍이 뚫린 왼팔에는 치료의 수월함을 돕는 것이라는 의사의 설명이 뒤따랐고 치료하는 것을 되새기는 것처럼 새로 입주한 바늘의 통증은 끊임없이 온몸의 신경을 통해 전달되었다.

 내리는 눈과 함께 시작한 첫 항암치료에서는 힘든 싸움을 함께 하고 있는 수많은 동지를 만날 수 있었다. 독한 약물을 수차례 주입하며, 그 치열한 전투에 맞서는 그들의 눈빛에서는 미약하지만 꺼지지 않는 생의 의지가 번져 있었다. 가슴 속 살아 숨 쉬는 불씨를 지키기 위해 투쟁하는 용맹함에 나 역시 용기를 얻으면서 무조건 이 전쟁에서 승리를 고하겠노라고 마음을 다잡았다.
 떨리는 마음으로 지정 침대에 누워 들려오는 유의 사항에 최선을 다해 집중했다. 정해진 시간에 맞춰 약이 투여되었고 그것을 바라보며 무의식적으로 나는 스스로에게 최면을 걸듯 다짐했다. 
 ‘괜찮아, 나는 나을 거야.’ 무조건 이겨낼 수 있다고. 나는 해낼 거라고.

 마법과도 같은 최면을 걸어놓는 사이, 바늘을 타고 들어간 독극물은 몸속을 끝없이 유랑했다. 몸이라는 거대한 제국에 입국한 항암제는 적군을 넘어 멀쩡한 아군까지도 쓰러트리는 여느 침략자와 다를 바 없었다. 낯선 약들이 몰아치는 탓에 정신을 차리기 힘들었고 몸은 최선을 다해 거부했다. 항암제와 몸과 정신만의 끝없는 싸움이 반복되면서 나 역시 나만의 전쟁을 계속해나갔다. 중도 포기라는 선택지는 없었고 무조건 끝까지 완주할 내 모습을 그리며 그렇게 항암과의 싸움을 시작했다. 
 2차, 3차, 점차 횟수가 늘어가면서 몸은 계속 변해갔다. 멀쩡했던 무릎은 박살난 것 마냥 아팠고 손가락은 퉁퉁 부어 주먹을 쥘 수 없었다. 머리카락은 민들레 홀씨처럼 단숨에 사라졌고, 털과 손톱, 관절과 근육들이 쉴 틈 없이 녹아내리며 눈에 보이는 모든 것이 변해갔다.
 곧이어 민둥산 같은 머리가 나를 반겼다. 하지만 그런 모습에도 나는 입꼬리를 힘껏 올리며 웃었고, 더 밖으로 걸으러 나갔다. 세상의 눈살에서 벗어나 버킷리스트였던 시원한 삭발 머리를 자유롭게 도전할 수 있다는 사실에 꽤나 마음이 들떴다.

 눈을 뜨면 나를 바라봐주는 엄마, 내가 원하는 음식을 먹으며 쉴 수 있다는 그 자체에도 큰 감사를 느꼈다. 어릴 때 엄마에게 부리지 못했던 살가운 애교들이나 먹고 싶어도 참았던 음식들을 죄책감 없이 먹을 수 있는 행복은 그때의 내가 찾은 또 하나의 선물이었다. 의도치 않았지만, 그 새로움과 함께 나는 다채로워진 내 삶을 기꺼이 즐겁게 살아보겠노라고, 긴 머리카락으로부터 해방되어 자유로워진 나의 머리처럼 나 역시도 이 병을 이기고 자유롭고 행복하게 살겠노라고. 그런 생각들이 더 가득하게 되었다.
 이 시간은 공부와 취준이라는 퀘스트를 향해 끝없이 달려왔던 삶에 합법적으로 주어진 달콤하고도 죄책감 없는 휴식임이 틀림없다고. 그렇게 웃으며 최대한 긍정적인 마음으로 여유로운 삶을 살아냈다. 

 그렇게 생각한 마음가짐 덕분이었을까?
 항암을 계속 진행하면 할수록 몸속의 암세포는 빠르게 숫자를 줄여갔다. 초반에는 약물에 대한 부작용도 심했고 어떤 날은 치료가 힘들어서 약을 복용 후 이틀 내 잠들어있기도 했지만 절대 치료를 포기하지 않았다. 그건 이번의 치료로 무조건 나을 것이라는 확신에서 파생된 자신감이었다. 시간이 지나 6차라는 항암을 끝마치며 내 몸속 역시 족쇄에서 벗어나려는 것처럼 암에서 해방되어 있었다. 긍정적인 생각과 자유로운 일상, 잘 챙겨 먹는 음식의 덕분이었는지 경과는 좋았고 치료 예후도 매우 좋았다.
 마지막 항암 이후 없어진 암세포를 확인함과 동시에 PICC관 역시 제거했다. 몸속에 있던 긴 바늘이 사라지는 순간의 짜릿함을 나는 아직도 잊을 수가 없다. 추후 발병을 확실히 예방하기 위해 시작된 15차례의 방사선 치료를 지나며 나의 정신도 마음도 몸의 상태도 안정적으로 돌아오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15차의 마지막 방사선 치료 때, “다시는 오지 마세요!”라는 담당 방사선사님의 말을 끝으로 어두운 병원 지하 1층으로 갈 수 있는 통로가 영영 차단되었다. 그걸 인지한 순간 그제야 나는 길었던 8개월간의 치료가 종료된 것을 실감할 수 있었다.

 시간은 어느덧 25살의 여름을 향해 달려가고 있었다. 치료가 끝나니 흰색으로 뒤덮였던 세계는 어느새 푸른빛을 찾아가고 있었다. 여름이 오기 전 무사히 마친 치료로 나는 온전히 여름 풀 내음을 맡으며 걸어 다닐 수 있었다. 태풍으로 비가 오고 바람이 불어 새로 핀 풀과 꽃들이 날아갔지만, 며칠이 지난 후 다시 새로운 씨앗이 어디선가 솟아나듯 발아했다. 몸도 마찬가지였다. 치료 종료 3개월 후, 머리는 다시 세상을 향해 모습을 드러냈다. 연약했던 손톱은 한 번의 전투를 거치며 더욱 단단해져 있었다. 세포들의 장송곡이 아무리 울려 퍼져도 삶의 법칙을 이겨낼 새로운 세포들이 발아했던 것이다. 그렇게 살아보려고 노력하는 내 몸을 보며 무척 대견스럽다거나 애틋한 그런 감정이 느껴졌다.
 근육이 없어지는 것을 방지하기 위해 매일 엄마와 함께 걷고 걸었던 얼어붙은 차가운 길도 여름이 되자마자 쏟아지는 태양의 힘에 의해 덥고, 습하고 뜨거워졌다. 계단을 오르내릴 때마다 끊어질 듯 아팠던 무릎이 언제 그랬냐는 듯 뛰고 오르고 내리는 것에 문제가 없었다. 완치된 몸으로 걷는 한여름 밤의 해변, 산책길, 석촌 고분의 조각들이 평생의 기억이 되어 내 삶 속에 살아 숨 쉬었다. 그렇게 나는 다시 세상 속으로 돌아왔음을 실감했다. 

 몸의 상태가 괜찮아지면서는 눈에 보이지 않았던 것이 비쳤다. 덜 더운 여름밤의 거리를 온전히 만끽하며 걸을 때 느꼈던, 우직하게 존재감을 드러내는 나무보다 더 강한 엄마라는 존재였다. 매서운 추위부터 뜨거워지기 전의 초여름까지 그녀는 내 옆에서 한시도 떠나지 않았다. 그건 일종의 그녀가 내게 느끼게 된 부채감이자 죄책감이 모여 만들어진 사랑과 애정, 미안함과도 같았다. 그런 감정들은 내게도 죄책감으로 남아 가슴 한켠에 무거운 돌덩이가 되었다. 그 돌덩이들이 쌓이고 쌓여 엄마와의 벽을 만들기도 했지만, 결국 그 벽도 모두 엄마의 손길과 쉼 없는 애정으로 인해 무너질 수밖에 없는 유약한 유리와도 같았다.
 하루는 캐묵은 서로의 감정을 삭이느라 작은 방 안에서 붙잡고 뜨거운 눈물을 흘린 기억을 나는 아직도 기억한다. 살아가는 평생에 있어 그 깊고 아릿한 대화를 엄마와 나눴다는 사실만으로도 가슴 한켠에 묻고 갈 일평생의 기억이 되었다. 

 치료로부터 4~5개월이 지난 지금은 7~8km를 뛰어도 무리 없이 달릴 수 있는 두 다리와 가족들과 함께 전국 여행을 할 수 있는 체력을 갖게 되었다. 조금은 이른 나이에 암에 걸렸지만 그러기에 나는 빠른 회복력을 갖출 수 있었다.
 정기검진에서는 정신적 지주인 의사로부터 ‘머리가 빠르게 자라네!’와 같은 칭찬의 이야기를 들으며 내 삶에 대한 자신감을 더 증폭시켰다. 의사 선생님의 빠른 판단과 지속적인 진찰, 관심과 응원이 아니었다면 그때와 지금의 내가 버틸 수 있었을까 같은 그런 생각을 매번 곱씹었다.
 2차 검진에서 만난 그녀의 소견에서는 이제 일반인처럼 살아도 괜찮다고, 어디든 자유롭게 유럽 여행을 30박 31일 다녀도 괜찮다는 결과 속에서, 암에서 조금은 자유로운 일상으로 다시 안착할 수 있었다. 그렇게 나는 오늘도 도서관도 다니고, 항암 때 보았던 아름다웠던 자연의 경관들을 표현하는 비즈를 제작하기도 하다가 엄마와 아빠와 동생과 함께 밥을 먹으며 웃을 수 있는 하루의 소중함과 행복함을 다시 알게 되었다.

 암을 치료할 때 중요한 건 나를 모질게 대하지 않는 것, 부정적인 마음이 올라올 때마다 힘내어 갖는 긍정적인 마음가짐이 정말 중요한 요인이라고 생각한다. 충분한 잠을 자고 좋아하는 음식을 먹으며 온전하게 나를 위한 선택과 행복만을 생각하는 것. 정말 어렵지만 그게 나를 나을 수 있도록 만들어 준 일등 공신이 아닐까 한다. 
 갑작스럽게 찾아온 고난은 당황스럽고 너무나도 힘들겠지만 어떤 측면에서 볼 때 좋은 기회이기도 하다. 나는 병에 걸린 순간부터 지금까지도 그 생각에 변함이 없다. 가족에 대한 끈끈함, 바쁘게 살아온 삶에 대한 쉼표, 앞으로의 삶에 이정표에 대한 수정. 이 모든 것을 한 템포 내려놓고 차분히 바라보며 경험할 수 있는 또 하나의 기회인 것이 자명했다. 개인적으로는 가장 크게 느꼈던 가족의 사랑 덕분에 삶의 버팀목이 있다는 걸 알아차렸고, 아플 때도 항상 곁에서 있어 주었던 그 소중한 존재는 나를 밑바닥에서 끌어올리게 만들었다.

 또 지금껏 건강을 신경 쓰지 않았던 내 삶 속에서는 새로운 이정표로 건강이 추가되었다. 막연히 젊음을 찬가하며 간과했던 이십대 초반을 넘어 체계화된 건강 체계와 관리가 그 무엇보다 중요한 것을 알 수 있었다. 건강하지 않으면 아무것도 못 한다는 말을 몸으로 직접 체감한 그 순간부터 나는 지금까지와 다른 삶을 살겠다고 선언하는 것과 다름없었다. 반대로 건강하다면 무엇이든 할 수 있기에 그건 이전까지의 건강한, 그리고 앞으로 건강할 내 삶에 대한 또 다른 시작임이 분명했다. 그렇게 알게 된 새롭게 깨닫게 된 사랑스러운 관계도, 나아가야 할 새로운 삶에 대한 방향성도, 미래와 노후를 위한 새로운 가치관도 모두 이번 고난을 통해 또 하나 얻게 된 선물 같은 통찰이라는 생각이 든다. 

 나는 아직도 종종 목을 만진다. 목에서 느껴졌던 그 혹의 촉감을 생각하면 아직도 아찔하고 심장이 철렁 내려앉을 것만 같아서 습관처럼 목을 만진다. 그렇게 목을 만지다 보면 저절로 내가 살아있는 것마저 느끼게 만든다. 그리고 내가 두 발 딛고 세상에서 살아있노라고 그렇게 체감할 수 있었다.
 암이라는 것이 막연히 어두운 동굴 속에 갇혀 미래가 보이지 않는 무서운 것일까? 물론 나 역시도 그랬던 시간이 길었기에 그 힘들고 고통스러운 과정을 떠올리면 눈물이 흐른다. 그렇지만 단지 어두운 동굴 속이 아닌 새로운 삶의 지향점을 갖게 만들어 준 기회의 태양이 비춰주는 길이라는 것을 깨달은 순간 세상이 달라 보였다.
 언젠가 엄마가 내 손을 잡고 해준 말이 생각난다. “너는 지금부터 다시 태어난 거야. 지금부터 1살이고 너의 시계가 다시 새로 움직이는 거야. 걱정 마. 너는 잘할 거야”. 앞으로의 고난이 닥쳐와도 이보다 더한 고난이 자주 찾아올까? 라는 생각이 든다. 그 어떤 고난이 와도 다시 마라톤을 뛸 수 있게 된 내 몸처럼, 나 역시도 모든 일에 포기하지 않은 채 결국 나의 미래가 나만의 시간이, 내 순간이 찾아오지 않을까.

 누군가 이른 나이에 삶의 절망이 갑자기 들이닥쳤더라도, 암에 걸렸더라도 포기하지 말고 부디 많은 걱정보다는 다가올 미래를 함께 준비하며 행복해하길 바란다. 나 역시도 지금부터 내가 쓸 페이지의 첫 시작이기에 이를 시작으로 나는 더 힘차게 내 이야기를 써 내려 갈 수 있을 것이다.
 내 삶은 이제 다시 시작이다.

목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