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암 희망 수기

[암 희망 수기 10회] 두 번째 삶

2025-01-08 17:29

글쓴이 : 김*정
 이 글을 쓰기까지 고민이 많았다.
 내가 글을 쓰는 것이 맞을까. 더군다나 암 희망 수기라는 취지도 있는데 과연 취지에 맞게 글을 잘 쓸 수 있을까. 그러다 문득 작년 이맘때가 생각났다.
 삼중음성유방암을 진단받고 절망에 빠져 있을 때, 병원에 걸려있던 ‘암 희망 수기 공고 플래카드’를 봤었다. 그때 다짐했었다. ‘지금부터 암 치료를 잘 받아서 반드시 일 년 후에는 다시 건강해질 거야~ 그리고 반드시 암 희망 수기를 써서 제출해야지!’ 그리고 나는 그 약속을 지키기 위해서 이렇게 노트북 앞에 앉았다. 

 작년 7월 어느 날,
 친한 직장동료들과 기분 좋게 식사 모임을 마치고 나는 평소보다 일찍 귀가했다. 침대에 누워서 무심코 가슴을 만졌는데 평소보다 느낌이 이상했다. ‘어라~ 원래 왼쪽 가슴이 이렇게 딱딱했었나?!’ 하며 오른쪽 가슴을 만져 보았는데 오른쪽 가슴은 딱딱하지 않았다. 좋았던 기분은 사라지고, 갑자기 불안감에 휩싸여 스마트폰으로 가슴 혹 관련해서 폭풍 검색을 했다. 검색 결과는 섬유선종부터 시작해서 유방암까지 다양하게 나왔다. 갑자기 가슴이 두근두근 방망이질을 시작했지만 애써 태연함을 가장하며 ‘에이~ 아니겠지! 설마 이렇게 젊은 나이에 무슨 유방암이겠어~ 혹이 있어봤자 맘모톰으로 제거할 수 있다고 나오는데~ 일단 집 근처 병원이나 예약하자!’ 생각했다. 

 지금까지 건강검진을 2년마다 받으면서 유방촬영술은 몇 번 받아봤지만, 인터넷 검색을 통해서 유방외과가 있다는 것은 처음 알았다. 바로 내가 살고있는 지역의 병원을 검색해봤지만, 유방외과 전문의는 고작 2명 정도에 불과했다. 그리고 전화해보니 당장 받을 수 있는 것도 아니고 미리 인터넷으로 예약을 해야 한다고 했다. 인터넷 후기가 좋았던 A 전문의가 있는 병원에서 검사받고 싶어서 인터넷으로도 예약을 시도하고 심지어 주말에 아침 일찍 병원을 찾기도 했지만, 번번이 예약에 실패하여 어쩔 수 없이 B 전문의가 있는 병원으로 8월 중순으로 예약을 잡았다.

 그 사이, 어느 날부턴가 왼쪽 가슴의 딱딱한 부위에 간헐적인 찌릿찌릿함이 느껴졌다. 마치 그 부위만 갑자기 전기 자극을 받는 것 같았다. 말도 못 하고 혼자만 끙끙 앓고 있었는데 휴가 갔을 때 신랑도 왼쪽 가슴에 혹이 있는 것을 알게 되었다. 둘 다 불안했지만 ‘설마…. 아직 젊은데….’ 하는 마음이 컸던 것 같다.
 이제 막 40대 초반의, 결혼한 지 채 1년도 되지 않은, 우린 아직 신혼부부였다. 그리고 조심스레 2세 준비 얘기도 오가고 있었다.

 드디어 유방외과 전문의 예약이 잡힌 날 병원을 찾았다. 의사 선생님에게 증상을 얘기하니 촉진을 해보자고 하셨다. 처음에는 의사 선생님도 섬유선종인 것 같다며 정확히 알기 위해서 유방초음파를 해보자고 하셨다.
 다시 며칠 후 유방초음파를 위해서 병원을 찾았다. 모양이 좋지 않았는지 영상의학과 선생님이 “혹시 폐결핵 앓은 적이 있나요?!”라는 나에겐 다소 엉뚱한 소리를 했다. “아니요”라고 대답하고 며칠 후에 다시 병원을 찾았다. 유방외과 선생님이 유방초음파 결과 모양이 좋지 않으니 조직검사를 해보자고 하셨다. 다시 며칠 후 가슴부위에 총을 탕탕~ 쏘는 총조직검사를 했다. 나는 너무도 건강한데 이런 검사를 왜 받나 싶어서 갑자기 서러워 눈물이 흘렀다. 담당 영상의학과 선생님은 무척 사무적이었지만 담당 간호사 선생님은 화장지를 주시며 “아닐 수도 있으니 너무 걱정하지 말라”고 하셨다. 

 그렇게 초조함 속에서 일주일을 보내고 있는데, 병원에서 면역염색검사를 추가로 한다는 문자가 왔다. 결과가 나오려면 일주일에서 2주 정도가 더 소요될 수 있다고 했는데, 그 담날 근무 중에 갑자기 연락을 받았다. 결과가 나왔으니 오늘 병원에 올 수 있냐고. 보호자랑 오라는 얘기가 없어서 직장에 부랴부랴 조퇴를 내고 혼자 병원을 찾았다. 오후 4시까지 오라고 해서 정신없이 운전하여 시간에 맞게 병원에 도착했더니 정작 오후 4시가 넘어도 다른 환자들을 먼저 진료했다. 드디어 모든 환자들이 다 돌아가고 맨 마지막에 나를 호출했다.
 유방외과 선생님 표정이 한없이 어두웠는데 첫마디가 “조직검사 결과는 암입니다.”였다. 순간 온몸에 소름이 끼치며 눈물이 하염없이 흘렀다. 어느 유행가 가사처럼 머리에 총 맞은 것처럼 정신없는 상태에서 “몇 기인가요?” 질문했지만, “1기 일수도 있고, 2기일 수도 있고, 그 이상일 수도 있다. 자세한 얘기는 대학병원에 빨리 예약해서 들으세요.”였다. 불과 5분 전까지 나는 ‘건강한 사람’이었지만, 그렇게 한순간에 ‘암 환자’가 되었다. 

 병원에서는 당장 나를 ‘산정특례자’로 등록을 했고, 대학병원 초진에 필요한 서류를 발급해 주었다. 그리고 ‘암 선고’를 받은지 몇 분 정도밖에 되지 않은 나에게 어느 대학병원에서 치료받을 건지 질문을 했다. 내가 오늘 ‘암 선고’를 받을지 어떻게 알고 대학병원을 알아봤겠는가! 병원 담당 직원은 자신의 업무였을 뿐이겠지만, 일년이 지난 지금도 그 질문은 상처로 남았다.
 무슨 정신으로 운전을 해서 집으로 돌아왔는지 모르겠다. 신랑에게 전화가 와서 울면서 “나 유방암이래~ 나 이제 어떡해?” 했는데, 잠시 후에 신랑이 집으로 들어와서 말없이 나를 꼭 안아주며 눈물을 흘렸다. 신랑이랑 같이 엉엉 우는데, 친정엄마도 뒤이어 들어와서 ”우리 막내 “하며 부둥켜안고 울었다. 알고 보니 신랑이 친정에 들러서 친정엄마를 모시고 왔던 것이다. 

 그다음 날부터 신랑과 나는 일단 서울의 내로라 하는 빅5 병원에 먼저 전화를 돌려서 초진 예약을 잡았다. 초진 예약에는 모두 성공했지만, 당시가 9월 초인데도 10월~12월로 초진 예약이 잡혔다. 너무 오래 기다릴 수는 없다고 생각해서 신랑이 화순전남대병원에 초진 예약을 잡았다. 화순전대병원은 9월 하순, 약 2주 뒤로 초진이 가능했다. 그리고 신랑이 담당 교수님 검색해보더니 꽤 유명하고 실력 있으신 분이라며 너무 걱정하지 말라고 했다.
 그렇게 지옥처럼 슬픈 하루하루가 흘러 화순전대병원에서 초진을 봤다. 교수님이 나의 암 타입은 삼중음성유방암 2기 말 정도(약 3㎝)라고 설명해 주셨다. 처음에는 그게 무슨 뜻인지 몰랐다. 나는 지금까지 암이 몇 기인지 단계를 나타내는 정도만 있는 줄 알았다. 그런데 유방암은 아형에 따라서 호르몬 양성, 허투 양성, 삼중음성 등으로 나눌 수 있는데, 나는 에스트로겐, 프로게스테론, 허투가 모두 음성인 삼중음성 타입이었다.
 유방암은 타입에 따라서 치료 방법도 달라지고, 전이가 있는지 없는지도 중요했다. 여러 날에 걸쳐서 각종 검사(MRI, CT 촬영 등)를 받은 결과 나는 유방암 크기가 3.7㎝, 겨드랑이 전이도 있는 것으로 보인다는 판단하에 선 항암치료를 받고 수술 등을 해야 한다고 하셨다. 그렇게 직장에 진단서를 제출하여 병가를 내게 되었고, 선 항암치료를 시작하기 위해서 케모포트 시술도 받았다. 

 10월 말부터 선 항암치료로 (키트루다, 파클리탁셀, 카보플라틴 조합)으로 3주 간격으로 4회 입원 항암, (키트루다, 아드리아마이신, 사이클로포스파미드 조합)으로 3주 간격으로 4회 입원 항암을 받게 되었다. 그리고 추가로 파클리탁셀은 첫 8주 동안 일주일에 한 번씩 통원항암을 받아야 해서, 선 항암은 16차례에 걸쳐서 진행된다고 했다. 선 항암만 거의 반년이 걸리는 엄청난 치료과정이었다.
 첫 항암을 받았을 때는 컨디션이 너무 좋고 신체적으로 큰 부작용이 없어서 ‘생각보다 항암이 별거 아니었네~ 괜히 걱정했어’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2주째 되던 날 아침 머리를 감는데, 진짜 거짓말처럼 머리카락이 숭덩숭덩 빠져 버렸다. 며칠 전, 허리까지 내려오던 탐스러운 머리카락을 단발머리로 잘랐음에도 충격이 컸다. 울면서 신랑에게 전화하니 당장 광주에 인모가발을 사러 가자고 했다.
 가발 가게에 가서 사장님에게 상황을 설명해 드리고 가발을 구입하니 이제 쉐이빙을 해야 한다고 하셨다. 거울을 보며 의자에 앉아 있는데 사장님이 바리깡으로 남아 있던 머리카락을 전부 밀어버렸다. 태어나서 까까머리는 난생처음이라서 낯선 내 모습에 눈물을 펑펑 흘렸는데 사장님이 두상이 참 예쁘다며 위로를 해주셨다. 11월 늦가을 찬 공기가 갑자기 머리와 목을 파고들어 머리카락의 소중함을 느끼게 해주었다. 거의 반년간은 꼼짝없이 탈모 상태로 지내야 하는구나 싶어서 새삼 내가 암 환자인게 느껴졌다.

 10월 말~12월까지 키트루다, 파클리탁셀, 카보플라틴 조합으로 4회 입원 항암을 했고, 파클리탁셀은 매주 한 번씩 8회 통원항암을 받았다. 신랑이 동행해줄 때도 있었지만, 신랑은 직장을 다니고 있었기에 절반 정도는 혼자 항암을 받으러 갔다. 한 시간 넘는 거리를 혼자 운전해서 가고, 항암을 받고 다시 한 시간 넘게 운전해서 집에 오기도 했다. 또 항암을 받고 한 시간 넘게 운전하기 힘든 날에는 시댁이 병원과 가까워서 시댁에 가서 하루 쉬었다가 오기도 했다.
 내가 유방암에 걸린 사실을 알았을 때 시어머니는 ”내가 아픈 게 낫지, 왜 네가 아프냐“며 나를 끌어안고 우셨다. 그리고 내가 치료받는 동안 시댁에서 잠깐씩 머물 때도 밥도 차려주시고, 반찬도 이것저것 해주시며 많이 걱정을 해주셨다. 

 매번 병원 동행을 해줄 수 없어서 고민하던 신랑은 1월부터 반년간 휴직을 하게 되었다. 나는 걱정하지 말고 직장을 계속 다니라고 했지만, 내가 혼자 병원에 다니는 게 신경이 많이 쓰인다며 고집을 부렸다. 내가 말은 그렇게 했지만 내심 고맙긴 했다.

 선 항암을 열심히 받고 가공식품은 많이 배제하여 식단을 바꾸고, 날마다 만 보 가까이 걸었다. 그래서일까 1월에 실시한 중간검사에서 암이 3.7㎝에서 1.2㎝로 줄었다고 하셨다. 뭔가 희망이 생기는 느낌이었다.
 1월 중순부터는 키트루다, 아드리아마이신, 사이클로포스파미드 조합으로 4회 입원 항암을 하게 되었다. 그런데 공포의 빨간약으로 불리는 아드리아마이신 등 항암제가 바뀌고 나서 오심, 구토 증상이 심하게 나타났다. 항구토제를 먹어도 소용이 없었다. 어지럽고 토할 것 같고, 음식 냄새를 맡으면 역겨워서 음식을 먹기가 힘들어 울기도 했다. 밥 냄새가 특히 힘들었는데, 식사할 때 최대한 환기를 하고, 과일 몇 조각으로 하루를 버티기도 했다. 그때는 차갑고 상큼한 음료나 과일이 유일한 위로가 되어 주었다.
 두 번째 항암부터는 산쿠소패치를 처방받아서 붙였는데 그나마 오심, 구토 증상을 완화해 주었다. 그런데 키트루다+AC 항암을 4회 하면서는 퇴원 후 48시간 이내에 ‘롤론티스’라는 백혈구 촉진제를 매번 맞아야 해서 번거로웠다. 냉장 보관해야 하고, 집 근처 병원에 직접 가지고 가서 팔에 맞았는데 바늘이 두꺼워서 엄청 아팠고, 맞고 나면 한 일주일간은 온몸의 뼈가 다 아팠다. 그때는 하루하루가 너무 힘들어서 어서 이 지옥이 끝났으면 했다.

 드디어 올해 3월 말, 선 항암이 끝나고 수술 전 검사를 했다. MRI, CT 검사를 했는데, 화면상으로는 암이 모두 사라졌지만 정확한 것은 수술을 통해서 조직검사를 해봐야 안다고 하셨다. 다만 미세석회가 있어서 부분절제 수술을 할지는 미지수로 남아 있었다.
 전공의 의료파업 여파인지 일주일 정도 수술이 밀리고 드디어 4월 말 수술을 받게 되었다. 일요일에 입원하여 월요일에 수술받았는데, 신랑은 물론 부모님, 큰아버지까지 병원에 와주셨다. 당일까지도 전절제 수술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어서 떨면서 수술실에 들어갔는데, 눈떠보니 다행히 부분절제 수술을 했다고 하셨고, 배액관 피도 잘 줄어들어서 일주일도 되기 전에 퇴원했다. 간호사님들과 같은 병실을 쓰던 다른 환자분들이 내가 젊어서인지 회복이 빠르다고 해주셨다.

 약 2주 후, 수술 후 외래진료에서는 그토록 바라던 완전 관해 판정을 받았다. 기존에 있던 유방암은 완전히 사라졌고, 겨드랑이 감시림프절에서도 암세포는 나오지 않았으며, 미세석회가 있던 부위에서도 암세포는 검출되지 않았다고 했다. 암 치료를 시작하면서 완전 관해가 가장 큰 소원 중의 하나였는데, 그동안의 고생이 보상받는 거 같아서 너무 기뻤다.
 하지만 치료가 모두 끝난 것은 아니었다. 교수님은 방사선치료, 후 항암치료 9번을 더 받아야 한다고 말씀하셨다. 부분절제 수술을 받았기에 방사선치료는 생각하고 있었지만, 키트루다 후 항암치료 9회를 더해야 한다고 해서 처음에는 당황했다. 하지만 실비보험이 가입되어 있다면 재발 전이를 조금 더 낮추어주기 때문에 키트루다 후 항암치료를 권하셨다. 
 방사선치료는 방사선종양학과 교수님이 16회를 권하셨다. 방사선치료는 6월 중순부터 받기 시작해서 7월 초에 끝났다. 날마다 가야 하는 번거로움이 있었지만, 치료 시간은 5분~10분 정도밖에 걸리지 않았다. 다만 상의 탈의를 한 채로 누워서 치료받는데, 방사선사 선생님들이 남자분들이라서 민망했다. 그리고 방사선 조사 부위에 싸인펜?! 같은 것으로 십자가 표시를 해두는데 선이 지워지면 안 돼서 샤워하는 것이 불편했다. 여름철이다 보니 땀이 나서 선이 자꾸 지워졌지만, 방사선사 쌤들이 쓱쓱~ 그려주시는 덕분에 그래도 무사히 16번을 잘 마칠 수 있었다. 처방해주신 재생 크림을 열심히 발라서인지 부작용도 크지 않아 다행이었다.
 방사선치료를 시작하기 전에 키트루다 후 항암을 먼저 시작했다. 역시 항암이기 때문에 3주 간격으로 병원에 1박 2일 동안 입원해야 했고 이 글을 쓰는 시점으로 후 항암 8차까지 마쳤다. 이제 후 항암 9차 딱 한 번만 더 하면 표준치료는 끝난다.

 유방암을 진단받고, 암 치료를 받으면서 나의 인생은 많이 바뀐 것 같다. 일단 식생활을 좀 더 신경 쓰게 되었다. 나는 평소 라면을 일주일에 3~4번 먹을 정도로 라면이 주식이었다. 짜장라면, 국물라면, 비빔라면 등 마트에 가면 종류별로 구입할 정도였고, 요리에 흥미가 없어서인지 라면을 먹는 게 편했던 것 같다. 하지만 지난 일 년간 라면, 과자, 소세지, 햄 등 가공식품은 되도록 피해서 거의 안 먹고 있다. 대신 대파, 양파, 고추, 버섯, 샐러드 등으로 냉장고를 채우고 채소를 많이 먹으려고 노력하고 있다. 또 외식하기보다는 되도록 집밥을 해 먹으려고 인터넷으로 레시피 검색도 종종 해서 따라 해본다.

 사실 유방암 진단 전에도 걷기는 좋아해서 평소 자주 걷는 편이긴 했지만, 유방암 치료 중에도 하루에 만 보 가까이 걸으려고 꾸준히 노력 중이다. 최근 피검사 결과 긴 항암 때문인지 콜레스테롤 수치가 높아졌다고 하는데, 교수님은 약을 먹기보다는 운동을 열심히 하라고 하셨다. 치료가 완전히 끝나면 걷기뿐만 아니라 헬스, 요가 등도 다시 도전해볼 생각이다.
 또한 나는 유방암 치료과정을 기록으로 남기고 있다. 내가 유방암을 진단받고 여러 환우의 블로그를 찾아보면서 치료과정에 대한 정보를 얻으며 많은 도움을 받았다. 그런데 소위 말하는 빅5 병원에 대한 글은 많았지만 화순전대병원에 대한 기록은 생각보다 많지 않았다. 화순전대병원은 아무래도 지방대학병원이고 환자 중에 연령대가 높으신 분들이 많다 보니, 블로그를 쓰는 이가 많지 않은 것 같아서 나는 블로그에 나의 치료과정을 글로 남기고 있다. 처음에는 이렇게 한다고 뭐가 달라지나~ 좀 귀찮을 때도 있었지만, 내가 남긴 블로그 글을 읽으며 “도움을 받았다. 고맙다.” 등 칭찬을 해주시는 분들이 있어서 종종 뿌듯함을 느끼고 있다. 표준치료가 끝나더라도 정기검진 결과 등 꾸준히 블로그에 글을 남겨볼까 한다. 

 나는 유방암을 치료하면서 감사한 부분도 느끼게 되었다. 먼저 다른 환자들에 비해서 후유증이 적은 편이었다. 항암을 시작하면서 탈모, 두피모낭염, 약간의 다리 부종, 오심 등을 겪긴 했지만, 그 정도가 심하지 않아서 다행이었다.
 두 번째는 보험의 소중함이다. 키트루다는 엄청난 고가 항암제라서 단독항암으로 입원하면 400만원을 훌쩍 넘긴다. 다행히 나는 20대에 실비보험, 건강종합보험에 가입해 두었고, 직장에서도 단체보험에 가입하여 병원비에 대한 부담은 많이 덜 수 있었다. 하지만 지금, 이 순간에도 ‘키트루다’라는 항암제를 쓰고 싶어도 보험이 없거나 경제적 부담 등으로 쓰지 못하는 삼중음성 환우들이 많다고 들었다. 빨리 키트루다가 급여화되어서 많은 분이 혜택을 보면 좋겠다.
 세 번째는 가족들에게 감사하고 싶다. 나를 위해서 과감히 6개월간 직장을 휴직하고 신랑은 휴직 기간 내내 병원에 동행해주었다. 그리고 나를 걱정해주시며 종종 죽이나 반찬을 만들어주시던 친정엄마와 시어머니, 그리고 아빠, 오빠 큰아버지, 이모, 외삼촌, 친구들, 직장동료들까지. 그분들의 걱정과 응원 속에서 내가 지금까지 이렇게 치료를 무사히 잘 받을 수 있었다. 
 네 번째는 나에게는 돌아갈 직장이 있다는 것이다. 나는 일년전 병가를 거쳐서 현재 질병 휴직 중이다. 이제 11월에 표준치료가 끝나면 내년 1월 직장에 복직할 예정이다. 하지만 많은 암 환우분들이 암 진단을 받고 치료로 인해 직장을 잃거나 휴직을 오래 못한다고 들었다. 산정 특례가 적용되어도 오랜 기간 암 치료를 받기 위해선 경제적으로 부담이 되는 게 사실이다. 사회적으로 암 환자들도 안정된 직장생활을 할 수 있도록 제도적으로 개선이 되면 좋겠다.

 나는 후 항암치료를 받으면서 복직 전까지 최대한 즐겁게 지내기 위해서 노력하고 있다. 영어 공부도 하고, 한자 공부도 해서 한자 3급 자격증을 따기도 했다. 또한 최근에도 미술 수업을 통해서 그림도 그리고, 재봉틀 수업을 받으며 에코백을 만들기도 했다. 그리고 주말이나 기념일 같은 특별한 날에는 신랑이랑 여행을 가기도 한다. 그 속에서 소소한 행복을 느끼는 중이다.

 처음에는 나만 아픈 것 같아서 너무 억울했다.
 하지만 지금껏 바쁘게 살아온 나에게, 어쩌면 이참에 쉬어가라고 주신 두 번째 삶 아닐까. 
 하늘이 주신 두 번째 삶은 정말 소중히 건강하게 살아갈 것을 다짐하며 글을 마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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