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암 희망 수기

[암 희망 수기 11회] 간호사였던 내가 4기 암 환자가 되어 경험하고 있는 항암 치료 이야기

2026-01-06 11:21

글쓴이 : 강*민
간호사였던 내가 4기 암 환자가 되어 경험하고 있는 항암 치료 이야기
강○민
 
이대로 조금만 더 덥고, 그 더운 여름이 사계절을 차지하여 우리를 괴롭힌다면, 여수 앞바다가 모두 사하라 사막으로 바뀔 것 같은 상상을 했던 올여름, 나의 친구들은 잘 지냈을까?

길거리에는 걷는 사람들이 점점 더 줄어들고, 집마다 에어컨 실외기가 달려있고, 누구라고도 할 거 없이 실내로만 몰려드는 계절을 보냈다.
집마다 여름옷은 더 얇아지고, 환자임을 은근히 내세우며 이런 핑계로라도 간편하게 살고 싶은 사람이지만 그 더운 여름에도 나는 챙겨야 할 속옷이 있었으니 바로 인조 유방이다.
 
그렇다. 나는 왼쪽 유방을 전절제한 4기 유방암 환자다. 절제한 가슴이 창피하다기보다는 균형이 안 맞는 상태로 다니기가 쉽지 않고 그러다 보니 여름을 탓하며 그동안 불편했던 심기를 괜히 계절에 투정을 부렸나 보다.
지금은 한낱 속옷에 더위를 얹어 불평을 해보는 여유가 있는 걸 보면 4기 유방암 환자가 다 된 것 같기도 하다.
4기는 좀 다른 세계 같다. 정작 그 길에 걷고 있어 보니 마음이 편안할 때도 있고, 아니 세상 모든 것이 그리 급하지 않게 생각하게 되었다.
어찌 보면 내게는 재발과 전이의 4기 환자가 되는 것을 막을 수 있었던 세월이 분명 있었는데, 그걸 놓친 게 맞는다는 생각이 항상 내 머리 위에서 우산처럼 펼쳐져 있는 것 같다.
 
나는 간호사였다. 졸업 후 줄곧 외과 병동에서 일했고, 간혹 내과에 병실이 없어 암 환자분들이 입원하셨어도 하루 이틀 후엔 모두 내과 병동으로 옮기셨다. 그래서 암 환자의 항암 치료를 보는 일은 많지 않았다. 어쩌다 오랫동안 항암 치료를 하는 환자분들을 볼 때면 독성 항암 약에 의한 신체 변화로 얼마나 힘든 치료를 겪고 있는지 알 것 같았고, 힘들어하셨던 그 모습들만이 슬라이드처럼 잔상으로 남아있다.
지금 내가 암 환자가 되어보니 죄송하게도 그분들을 너무나 뒤늦게 더 많이 이해하게 된다.
그럼 내 몸속의 유방암은 언제부터 자라나고 있었을까?
 
결혼 후 임신 시기에 왼쪽 유방에서 뭔가 만져지기 시작했고. 의사 선생님께서 유관이 뭉쳐서 그럴 수 있으니 출산 후 반드시 검진을 다시 받으라고 하셨다. 그러나 출산 후 육아와 직장에 묻혀서 검진을 잊고 살았고, 직장복귀 후 건강검진 시에 유방 검진에서 석회화라는 결과를 듣고 부분절제 수술을 한 후 암은 아니라 참 다행이라고 안도를 했다. 하지만 이것이 끝이 아니었다.
나 역시 남들과 다르지 않게 보험을 들어놨었고 한창 100세 시대에 대비하는 보험이 유행하면서 보장 기간을 늘리기 위해서는, 수술병력이 문제없다는 진단서를 다시 제출해야 했다.
진료실 담당 간호사가 대기하고 있던 나에게 다가와서 조용히 말해줬다. 다른 검사를 좀 더 해야 할 것 같다고.
갑자기 머리가 묵 찍은 해졌다. 다행히 암 크기가 크지 않았고 다른 곳으로의 전이가 없어서 1기라는 말을 들었다. 놀란 가슴을 쓸어내리며 또다시 왼쪽 유방 부분절제술을 받았다. 그래도 1기라니 너무 다행이지 않냐며 나 자신도 암 환자 같지 않은 마음가짐을 가졌던 건 아닌지 가끔은 아니 너무나 많이 후회된다. 이렇게 2011년 8월 여름, 암 환자로서의 나의 삶이 시작되었다.
 
암세포가 몸에 자리 잡기 위해서는 이미 오래전부터 시작이 되었을 텐데 더군다나 병원이 직장이니 뭔가 방패막이 쳐져 있어서 절대 나에겐 아무런 문제가 없을 것 같이 생각이 들었다.
어디에서 나온 자신감인지, 어리석음인지 모르겠다.
다행인지 모르겠지만, 항암 주사는 하지 않고 방사선 치료와 항호르몬 주사, 항호르몬 약으로 5년을 지냈다. 이때 즈음 유방암을 진단받은 간호사들이 여럿 생겨서 유행처럼 수술과 치료의 순서를 겪는 동료들이 여럿 있었고, 괴담처럼 극심한 스트레스가 여러 명의 간호사에게 암을 유발했을 거라며 너도나도 검진을 받게 되는 상황도 벌어졌었다.
하지만 방사선 치료는 나의 체력 한계를 느끼게 할 정도로 아주 힘들었고, 아픈 몸으로 간호사 일은 할 수 없어 사직했다. 내 몸속에 보이지 않았던 암처럼, 눈에 보이지 않는 방사선도 사람을 살리면서도, 사람을 힘들게 할 수도 있다는 생각을 침대에 누워서 여느 환자들처럼 새삼스레 했었다.
 
일을 그만두니 이것도 무력감을 느끼게 하는 이유가 되었다. 암 환자가 된 것보다 일을 못 한다는 게 더 슬픈 현실이었고, 그 치료를 견디지 못하는 내가 너무 싫어서, 나약해진 나를 붙잡아 다시 일어설 수 있도록 산으로 오르기 시작했다.
그러나 그동안 복용했던 약 부작용으로 자궁 부정출혈이 시작된 나는 응급으로 난소를 포함한 자궁절제를 해야 했고, 항호르몬제 부작용으로 폐경 증상들이 심해져서 관절이 점점 더 아프기 시작했다. 더 이상의 산행은 무리였고, 쉬엄쉬엄 걷는 것으로 상황이 바뀌었다. 나이는 40대인데 몸이 할머니가 하셨던 행동처럼 내가 하는 이 모든 상황을 받아들이기엔 마음의 여유가 없었던 그 시절. 지금 생각해보면 그럴 일도 아니었는데…. 하고 생각이 든다.
이때 더 관리를 잘했으면 4기가 안 됐을까?
 
5년의 치료가 마무리되면서 산정 특례가 해지되는 날. 이젠 평범한 삶으로 다시 갈 수 있다는 안도감으로 행복했다. 이것이 암 환자의 생활이 끝난 것이라고 확신했었다.
또다시 직장을 다니기 시작했으나, 하필 코로나가 심했던 그 시기부터 학교 보건교사로 출근하면서 24시간 감염자들 보고를 받는 시간을 보냈고, 하루도 편안하게 잠을 잔 적이 없었던 거 같다. 무한대로 쌓였던 행정업무와 난생처음 겪어보는 감염병과 싸움에 지칠 대로 지쳐있었다. 그때는 모든 국민이 다 똑같이 힘든 세월을 보냈을 것이다.
불규칙한 식사와 수면도 내 건강에 좋을 수는 없었다. 하지만 최선을 다하는 마음으로 2년을 견디다 보니 몸에 이상이 오기 시작했다. 혈압도 조금씩 올라가기 시작하고 진료를 봐도 뚜렷한 이유를 못 찾고, 내 몸은 계속 좋지 않았다.
산정 특례가 끝났어도 매년 정기검사는 꾸준히 받고 있었고, 내년에 보자는 인사를 매년 여름마다 했던 것 같다.
아, 여름이 문제였을까?
 
하지만 11년이 지난 2022년 정기검사가 있었던 여름에 또다시 4기 진단을 받았다.
그날은 여름방학이라, 검진을 받고 아들과 함께 서울 구경을 가기로 여행계획을 세웠었고,
빨리 서울로 가자면서 들떠있던 그때가 생각이 난다.
하지만 검사가 끝났는데 진료실에서 또 나를 부르지 않아 갑자기 두려움이 몰려왔다. 예전 생각이 나면서.
안 되는데…. 어쩌지…….
여름이 나하고는 안 맞나 봐….
 
1기라 가볍고 4기라서 무거운 암은 아니지만, 마음이 그랬다. 유방암 진단을 받으면 충격의 강도가 너무 무겁게 느껴져서 깊은 바닷속까지 내려갔다가 올라오는 경험들을 하게 된다.
1기에서 4기가 되는 기간은 11년이었다.
나는 4기 환자가 된 날, 아들이 스무 살이어서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앞으로 내가 얼마를 더 살 수 있겠느냐는 생각보다는, 언제가 될지는 알 수 없지만, 엄마 없는 삶을 받아들일 수 있는 성인이 되어서 걱정 하나는 덜었다고 안심을 했었다. 남편과 부모, 형제보다는 내 아들이 제일 많이 걱정되었다.
 
같은 곳의 유방에 새로 생긴 암이라 수술로 제거하자고 했고, 수술과 관련한 검사들을 줄줄이 했다. 괜한 걱정이 많아지고 주변의 말들이 하나도 들리지 않았다.
수술과 치료만 하면 괜찮을 거야…. 하고 스스로 세뇌를 하면서 입원 생활을 하고 있었다.
그런데 검사 결과 폐 전이란 말을 듣게 된 순간….
’나 죽는 거야?‘
’드라마에서 보면 다들 그렇던데 그게 내 경우가 된 거야?‘
’호스피스도 알아봐야겠지?‘
’얼마나 살수 있을까‘
 
재발이 되기도 했고 폐로 전이가 된, 그래서 치료는 계속 진행이 된다는 말을 들었다.
죽기 전까지 아니 약을 더이상 쓰지 못 할 때까지....였던가?
생각보다 너무 복잡하게 시작된 4기 환자로의 생활은 너무 외로웠다.
생각을 정리해야 했고, 또다시 직장을 사직해야 했다.
왜 난 이렇게 뭐든지 하다말고 정리해야만 하나 싶었다. 억울했다. 죽는게 낫겠다도 싶었다.
아니다. 살아야 한다. 이렇게 죽을 수는 없어. 라는 생각을 하루에도 100번도 더 했다.
4기 카페에 가입하고 종일 검색했다. 4기 환자라도 직장생활을 잘 하시는 분들이 많은데 도대체 어떻게 하시는 걸까 싶었다.
3주마다 학교를 뺄 수도 없으니 어쩔 수 없이 또 사직을 해야 했다.
기약 없는 항암 치료가 기다리는 나의 삶 속으로 난 또 걸어 들어가야 했다.
잘할 수 있을까 걱정했지만 지금까지 만 3년이 넘는 세월을 항암 치료를 받으며 살아온 걸 보면 나름대로 잘 관리를 한 것이 아닐까 생각한다.
 
처음 독성 항암부터 시작하는 치료는 예전 치료와는 비교할 수 없이 매우 힘들었다. 3주 간격으로 6회만 맞았던 독성항암제의 부작용이 만 3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남아있다. 이 정도는 자잘한 부작용이라고 4기 환자들은 말하고 있는 증상들이지만, 나름 힘든 시기도 있었고 다행히 좋아지고 있는 부작용들도 있으니, 그건 사계절 내내 썼던 모자들은 더 쓰지 않아도 되어서 종교가 없는 내가 모든 종교에 감사기도를 드리기도 했다.
그 이후 지금까지 3주마다 표적 치료 항암 주사와 항호르몬 약으로 치료 중이다. 환자분들이 겪는 흔히 4기 환자들이 말하는 ‘자잘한 부작용’들은 그냥 일상이기도 하다.
 
사람들은 많이 궁금해한다.
‘4기라는데 금방 죽는 거 아냐?‘
’4기는 호스피스로 간다던데?‘
’어쩌다 4기까지 된 거야?‘
’10년이 지났는데도 전이가 된다는 거야?‘
하다못해 입원 기간에 호스피스 병실에서 호스피스 안내가 새겨져 있는 홍보 수건을 받고서는 너무 참담한 마음이었다는 게 생각이 났다. 하필이면 4기인 내가 이런 안내를 받으니까 곧 죽을 수도 있는 거야? 라는 생각이 들었다.
 
이런 질문에 대한 답을 내 입으로 듣고 싶어하는 사람들이 많았다. 더군다나 그땐 변명 아닌 설명이라도 할 기분도, 체력도, 마음의 여유도 없었다. 점점 친구들을 피하게 되고 카톡으로 오던 안부 인사도 점점 줄어들고, 스스로 나를 산꼭대기에 올려놓은 채 신호만 주면 전속력으로 달려내려와 모든 것에 부딪혀서 나를 부숴버릴 것 같은 심정으로 지낸 시간들도 있었다.
언제 죽어도 놀랄 일 없는 게 4기라고…. 누군가 얘기했다.
정말 그런가?
 
표적항암제를 시작하면서 컨디션은 조금씩 돌아오기 시작했고, 독성항암제가 그렇게 힘든 줄은 몰랐다. 그래서 환자분들이 뼈만 앙상하게 되어가는 모습이었구나…. 하고 그때 환자들에게 나의 마음을 표현하며 위로의 말을 많이 해드리지 못한 걸 많이 후회하고 반성하게 됐다.
환자들에게 건네는 별거 아닌 위로가 어떨 때는 정말로 큰 위로가 된다는 것을 최근에 깨달았다.
내가 다니는 병원에서 처방된 항호르몬제를 원내 처방으로 받을 때 유독 한 약사분께서는 항상 약을 주시면서 ’화이팅입니다~‘ 라고 말씀해 주신다.
너무 힘든 날에는 아무 생각 없이 약을 받았었던 것 같다. 그리고 모든 위로의 말이 그냥 인사치레 같은 생각도 들었었다. 그랬던 나를 반성한다.
어느 정도 내가 컨디션이 회복됐을 때 똑같은 인사를 받고 난 너무 감동을 받았다.
그분도 진심이었겠지만 진심이 아니었어도, 굳이 힘내시라는 말을 저렇게 건네시기 전에 얼마나 생각을 많이 하셨을까를 깨달았다. 우리가 받는 주변의 응원은 늘 조용하지만, 힘있게 닿아있을 것이다. 마음이 열리지 않는 우리가 인지하지 못하는 것이 또 있을 것 같아 걱정된다.
모든 위로의 말들이 암환자들에게는 자신감의 자양분이 될것임을 알아주시기를 바란다.
 
한창 독성항암제로 컨디션이 좋지 않을 때 난 잊고 있던 것이 또 하나 있었다.
우리 엄마. 바로 친정엄마다.
엄마는 2011년 1기 진단을 받고 5년이 지날 때까지 안쓰러운 딸이 잠을 잘 잘 수 있도록 밤마다 온몸을 주물러 주셨다. 시원해지고 노곤해지는 몸을 느끼면서 난 그렇게 철도 없는 딸내미 노릇을 하면서 잠을 잤다. 여기저기 몸이 아프다고 엄마 앞에서 그렇게 몸을 맡기고 쿨쿨 잠을 잤으니 지금 생각해보면 참 불효를 하고 있었다.
그 이후에도 몸이 힘들 때면 엄마는 어떻게 그렇게 꿰뚫어 보시는지 바로 주물러 주시고는 그제야 잠자리로 가셨다.
암 환자인 나는, 내 아들이 받을 보이지 않을 상처와 걱정만 생각을 했었던 거였는데, 그 시간 동안 엄마는 딸인 나를 보면서 얼마나 힘드셨을까?
내가 항암 치료를 위해 병원을 가면서 좀 쉬면서 계시라고 말을 하고 가도, 항상 치료받고 있을 딸을 생각하시면서 속상해하시며 슬픈 마음을 대신해서 집 안을 청소하고 빨래하신다고 말씀을 하셨다.
그래서 더욱더 마음을 다잡았다. 팔순이 되신 엄마가 당신보다 딸이 먼저 죽을까 봐 걱정을 하시게 해서는 안 되었다. 암 환자지만 그래도 평범하게 일상을 사는 모습을 보여드리고 싶었다.
그나마 표적항암제로 바뀌고 나서 일반적인 음식을 먹기도 수월했고, 끼니를 거르지 않는 딸내미의 모습에 안심하시는 엄마의 얼굴이 보이기 시작했다. 엄마는 자식이 아픈 것이 가장 힘드셨던 것 같고, 나 역시도 그럴 것 같다. 55세의 나는 엄마의 걱정 인형이 되지 않기 위해 하루하루 건강하게 보내려고 노력 중이다.
나도 내 아들이 먼저 생각이 났고, 엄마도 그랬을 텐데….
자식 입장에서는 이렇게 나이가 들어도 부모의 마음을 다 헤아리지 못하는 부분이 너무도 많다.
그 덥던 여름이 지나고 병원 다니기 좋은 가을이 왔으나 잠시 정차만 하고 지나가는 기차처럼 어느새 겨울인 듯 추운 날들이 많아졌다.
지방에서는 새벽 기차를 타고 서울로 병원에 다니시는 분들이 많은데, 나 역시 새벽 기차를 타야 하는 상황이다 보니 또다시 엄마의 걱정이 시작되었다.
추운 날씨에, 중년이라도 여자인 내가 새벽에 기차를 탄다고 나가니 온갖 신경을 또 쓰시기 시작하시겠지.
또 잘 지내봐야겠다.
 
요즘은 많은 유방암 환자들이 생겨나는 걸 체감하고 있다. 물론 내가 유방암 환자 카페에 가입이 되어 있어 소식을 듣기도 하지만, 가까운 주변에서 유방암 환자들이 생겨나고 있어 당황스럽기도 하다.
그런 소식을 들을 때면 또 얼마나 많은 일상이 무너지는 슬픔을 겪을까 걱정이 된다. 본인의 꿈이 꺾이는 상황을 반드시 슬기롭게 넘기기를 바라고, 다시 일상을 살아지기를 마음으로라도 보태는 심정이다. 나 역시도 이렇게 지금처럼 생활하는 모습을 보면 그동안 힘든 시간이 언제였는지 까마득하기도 하니까.
모든 암 환자들이 그렇지만, 아픔이 다가와도 또다시 일어설 수 있다고 말하고 싶다. 항암제에 눌려서 힘을 못 쓰는 시기가 있었지만, 또다시 나에게 주어진 회복력으로 이렇게 일상생활을 누릴 수 있다는 현실과 희망이 있다는 사실을.
본인이 힘있게 서 있어야 주변 사람들의 걱정도 사라진다는 것을 내가 지내보니까 알 것 같다.
가장 힘든 시기를 겪었던, 겪고 있는 유방암 환자들에게 나도 “화이팅입니다~” 라고 말해주고 싶다. 우리는 좀 더 건강해질 수 있고, 일상을 살아낼 수 있고, 뜻하지 않은 삶의 의미를 알게 될 수 있으니까.
 
유방암 환자분들 우리 모두 화이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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